광복반세기 기념특집 우끼시마호 폭침사건 그후 5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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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반세기 기념특집 우끼시마호 폭침사건 그후 50년
  • 송진선
  • 승인 1995.08.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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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를 이어서라도 끝까지 투쟁할 것"
태평양전쟁의 희생양이었던 한국인들에게 또 하나의 희생을 부른 우끼시마호 폭침 사건이 발생한지 올해로 50주년을 맞는다. 정확하게 1945년 8월24일 오후 5시경 일본으로 강제징용당했던 한국인들이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문제의 우끼시마호에 승선했다가 원인 모르는 폭침으로 인해 고스란히 바다속으로 수장되어 버렸다. 일본정부에서는 약 6백여명이 희생당했다고 공표하고 있으나 당시 사건에서 극적으로 생환한 사람들에 따르면 적어도 5천명 내지는 7천명 가량 이 사건으로 사망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당시 우끼시마호에 승선했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생존자와 살아오지 못하고 사망해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있는 유족들이 보은에도 여러명 있다. 그동안 본보에서는 지난 92년 4월25일 1면에서 우끼시마호 폭침사건 관련기사를 보도한 것을 시작으로 여러차례 보도한 바 있다. 특히 이번 광복 50주년을 맞은 뜻깊은 해에 역시 50주년을 맞는 우끼시마호 폭침사건에 대해 재조명 함은 물론 생환자 및 유족의 생활을 게재하고 사건의 진상이 하루빨리 정확하게 규명되고 아울러 일본·정부의 진사와 배상이 있어야 할 것이다.

□아까운 수천명의 청춘 하늘나라로…
태평양전쟁에 강제 징용당한 한국인이 본국으로 귀환하기 시작한 것은 해방후 1주일이 지나서였다. 8월22일 수천명의 한국인들은 오마나토항에 집결해 부산으로 귀환한다는 4천7백30톤의 일본군함 우끼시마호에 승선했다. 그리고 이틀뒤인 24일 교토 인근의 마이즈루만에서 이 배가 폭발한 것이다. 당시 부산항으로 향하던 우끼시마호는 이틀간의 항해를 하던중 돌연 뱃머리를 돌려 교토의 마이즈루만으로 향했다. 마이즈루만에 들어선 우끼시마호는 도오시마를 지나 헤비지마와 시모사하가 사이에 이르는 8월24일 오후 5시경 갑자기 배가 심한 폭발음을 내면서 바다속으로 가라앉은 것이다.

아비규환의 상황에서 일부의 사람들은 떨어진 갑판 조각에 의지해 겨우 뭍으로 나왔는가 하면 인근에서 조업중이던 일본인 어부들에 의해 구출, 겨우 수백명만이 살아남았을 뿐이다. 수천명의 한국인이 바다속으로 수장당한 사건이었지만 그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공개되지 않고 역사의 뒤안길에 묻히고 말 또 하나의 사건으로만 기억될 뿐이었다. 다만 일제에 의해 강제 징용당해 강제 노역을 하고 해방을 맞아 그리운 고국으로 돌아오기 위해 우기시마호에 승선했다가 배가 폭발하는 사고로 많은 한국인 희생자를 냈는데 그중 천운으로 살아돌아온 극소수 생존자들의 증언으로 인해 세상에 조금씩 알려졌을 뿐이다.

그동안 이 사건을 두고 일본정부에서는 부딪히며 폭발하는 선박용폭발물인 촉뢰에 의한 사고라고 주장해왔으나 생존자들은 일본군이 계획적으로 한국인을 학살한 살인사건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증언자들에 따르면 부산으로 향하던 우끼시마호가 갑자기 뱃머리를 마이즈루만(무학만)으로 돌린점과 한국인들이 승선할 때 일본인들에게는 배에 식수를 실어야 한다며 모두 내리게 한 점등을 들면서 계획된 한국인 집단 살인사건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이 주장은 한국내는 물론 일본인들에게도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져 일본내의 많은 인권 변호사들이 무료 변론을 해주고 있다.

이와같이 최근 한국내에서는 물론 일본내에서도 인권변호사등을 중심으로 이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또 일본 정부의 진심어린 사과와 함께 배상이 있어야한다는 자각을 하며 우끼시마호 사건에 대한 관심이 확대되고 있다. 일본 언론에서도 서서히 관심을 갖고 있는데 특히 일본 문화방송에서는 7월3일 본사를 방문해 군내에 있는 우끼시마호 폭침 사건으로 사망한 사람의 유족 및 생환자에 대한 증언을 청취했는데 오는 21일 오후 6시경 일본 전국으로 군내 우끼시마호 폭침사건 생존자 및 유족의 증언 내용을 보도할 예정으로 있다.

이와같이 미약하나마 민간차원에서 이 사건에 대한 관심이 서서히 일고 있으나 아직 일본 정부차원의 진상규명이 되지않는 가운데 생환자 및 유족들은 개인 대 일본정부를 상대로 진상규명 및 승선자 명단 공개 그리고 진사와 배상을 받기위해 끝없이 지리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일본의 대주해군 시설부에서 밝힌 부도환 사몰자 명단에 보은 사람은 총 12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일본 정부와 한국인이 싸우고 있다
우끼시마호 폭침 사건에 대해 보다 적극적으로 파고들면서 세상에 공개한 것은 일본내에 거주하는 한국인들과 인권옹호가들로부터이다. 그동안 보상은 커녕 원인 규명조차 제대로 되지않은채 세월속에 묻혀있었던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이슈화 시켜 언론인들의 관심을 불러 모았던 것. 1992년 1월21일 '교토 자유 인권협회'주관의 우끼시마호 생존자 증언에서 생존자인 김동천씨(75. 영동읍 탑선리)를 초청해 일본의 NHK방송은 물론 각종 매체를 통해 그의 증언이 보도되면서 일본내의 여론이 환기, 쟁점화되기 시작했다.

경도 자유인권협회는 변호사를 비롯해 학자, 종교인등 지식인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김동천씨를 초청한 곳은 다름아닌 일본의 재일 한국인들로 구성된 우끼시마호 폭침 관련 일본에 진사와 배상을 촉구하고 재판을 청구하는 회(회장 송두희, 일본 경도 거주)에서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보상을 위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장을 제출했다. 이에따라 그동안 우끼사마호관련 사건을 접수한 일본교토 지방 재판소에서는 지난 6월까지 10차 재판까지 진행되었다.

일본인이 이 사건에 대해 관심을 가진 것은 불과 3, 4년정도 밖에 안되었다. 일본에서 조차도 외면해온 이 사건을 최근 일부 양심있는 일본의 지식인들이 자신들이 저지른 만행에 대해 잘못을 인정하고 진상을 밝히려는 노력이 서서히 일고 있는 것이다.

□생환자는 후유증, 유가족은 슬픔속 하루하루 연명
부도환 사건에서 다행히 살아남은자들은 그 후유증으로 자식을 두지 못하거나 각종 질병에 시달리고 있고 죽은자들은 대(代)까지 끊겨 제사조차 지낼 사람이 없는 등 유족들에게 안겨주는 슬픔이 더욱 크다. 사망자의 형제, 조카등 유족들은 그들이 사망한 8월24일 음력으로 7월16일을 제사일로 정해 매년 쓸쓸히 제사를 지내주고 있다. 생환자 중의 한명인 외속리면 하개리에 거주하고 있는 서봉구옹(70)은 20세도 안된 나이에 태평양 전쟁에 징용당했다 귀국하는길에 우끼시마호에 승선했다가 폭침, 가까스로 생명을 건져 귀국했다.

그때부터 고국에서의 고생길이 열렸다. 후유증으로 자식도 낳지못하는 신세가 되었는데 부인마저 몇년전 세상을 떠나 난청 현상과 함께 온 몸이 저리고 걷기조차 어려운 투병생활을 혼자 감내해왔는데 지난해에는 대장암이라는 판명을 받아 올해 장 절단 수술을 받았으나 다시 병이 악화돼 8월초에 부천시 소사구 성가병원에 재입원하는등 어려움을 겪고있다. 그런가하면 보은풍취의 이춘원씨(70)도 부도환 사건으로 인해 신체에 많은 손상을 입어 그 후유증으로 시달리고 있는데 지금도 귀가 멍해지는 현상과 배의 꼭대기에서 바닥으로 떨어져 엉덩이를 다쳐 걷는데 불편함을 느끼는등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생환자중 징용당시 보은누청에 살았던 김호식씨는 후유증으로 평생을 고생하다가 92년말에 사망했다. 이 사건에서 살아돌아온 이들은 우끼시마호 사건으로 부상당한 희생자에게는 그동안의 소극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양심적인 태도로 잘못을 사과하고 국가차원의 배상을 해야한다고 요구하고 또한 살아오지 못하고 죽었다는 소식만 전해들은 유족들은 "일제의 만행에 분노할 따름"이라며 일본정부의 사건에 대한 정확한 진상을 규명하고 아울러 진심어린 사과와 함께 배상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유족이나 생환자나 개인 대 일본정부를 상대로 싸우고 있는데 막강한 일본 정부가 코나 들썩하겠느냐"며 한국정부에서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이 사건의 진상규명과 배상을 받는데 적극적으로 대처해야한다고 요구했다. 탄부면 대양리에 사는 이미용씨의 경우 삼촌이 태평양전쟁에 징용당해 우끼시마호 사건으로 사망했는데 아직도 유골을 찾지못했다는 것. "일본에 삼촌의 유골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정말 산촌 것인지도 분명하지 않은 것이고 또 인근 영동의 어느 유족은 유골을 찾아왔는데 그후에도 또 유골을 찾아가라는 전갈을 받은적이 있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일본에서는 사망한 한국인에 대한 유골조차 제대로 관리하지 않고 있는 것 같다"며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치를 떨었다.

공부잘하기로 소문난 맏형이 징용하지 않으려고 서울등지로 도망다니다가 결국 끌려가 우끼시마호 사건으로 희생되었다고 술회하는 나대찬씨는 "형님은 이 세상에 흔적조차 없다. 자식조차 없다는 말이다. 내가 하지못하면 내 자식들에서라도 이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배상을 받아내는데 끝까지 투쟁할 것"이라며 눈시울을 적셨다. 한편 군내에서 이 사건과 관련한 유족 및 생환자들은 지난 92년부터 우끼시마호 사건의 생환자와 유족은 일본 마이즈루만을 방문해 우끼시마호가 폭침당한 곳을 찾아가 희생당한 사람들의 명복을 빅고 동포들이 세운 위령탑에도 참배하고 있다.

또한 희생자의 유골이 안치된 유텐지(유천사)도 찾아가 그들의 넋을 추도하고 있다. 그러나 올해는 우끼시마호 폭침 장소를 찾아가 고인의 명복을 빌고 위령탑을 참배하는 대신 광복 50주년, 사건발생 50주년을 맞아 8월23일 일본 대사관을 항의 방문해 우끼시마호 사건의 진상규명과 함께 일본정부의 사과와 배상을 촉구할 예정이다. 광복 50주년, 일본 패전 50주년 우끼시마호 폭침 사건 50주년을 맞은 1995년 아직까지도 정부에서는 일본정부에 진상규명조차 요구하지 못하고 있는 처지를 기억, 다시한번 역사가 주는 교훈을 되새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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