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속의 보은인 천성호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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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속의 보은인 천성호씨
  • 송진선
  • 승인 1996.08.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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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도 인도네시아 명예대사로 활동
자랑스런 보은인 천성호씨는 인도네시아에서 없어서는 안될 정도로 국가경제 향상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그래서 인도네시아에서는 천성호씨에게 최고의 대우를 해주면서 도움을 받으려 하고 있다. 인도네시아 각장관은 물론 대통령도 수차례 천성호씨가 운영하고 있는 회사를 방문할 정도이다.

천성호 신드롬을 낳은 장본인이니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가 경영하고 있는 회사는 스포차화 제조 공장과 도자기 생산 공장이다. 그에게 딸린 사람이 근로자만 총 6천명, 그들의 가족까지 합하면 1만명이 훨씬넘는다.

그들에게 천성호씨는 자신들이 먹고 살 수 있도록 일자리를 주고 돈을 주고 그래서 부를 가져다 주는 신과 같은 존재인 것이다. 이처럼 탁월한 경영능력을 발휘 세계속의 한국인으로 명성을 얻고있는 보은의 자랑스런 기업가 천성호씨. 지역을 사랑하는 사람으로도 잘 알려진 그는 지난 94년 충북도 인도네시아 명예대사로 활동하며 충북의 기업이나 행정기관에 각종 정보를 제공해 충북의 세계화에 이바지 하고 있으며 보은의 크고 작은 행사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여 왔다.

그런 그가 지난 4일 충북정도 1백년 기념행사의 명예대사 대회에 참석해 '자랑스런 도민상'을 수상하며 과분한 상을 받은만큼 앞으로도 세계속의 충북을 빛내는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천성호씨가 인도네시아에서 활동한 것은 약 15년. 천사철씨의 장남으로 삼산초교와 보은중, 청주고, 중앙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아버지가 하고 있던 삼양주유소와 대한통운을 운영했다.

그 뒤 81년 친구의 소개로 인도네시아에 들어가 88년까지 현지 회사에서 경영수업을 받다 그해 유명한 스포츠화인 리복을 생산하는 'P.T. 동조 인도네시아'를 설립했다. 공장부지 10만평에 건물 3만평, 종업원이 5천명. 그 나라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데도 불구하고 경영학을 전공하고 착실히 경영수업을 받은 그는 특유의 경영수완을 발휘해 단순한 하청업체격에서 93년에는 리복사의 파트너 공장으로 승격될 정도로 세계굴지의 기업으로 성장했다.

지난해에는 6천8백만 달러의 매출실적을 올렸고 올해는 8천2백만달러 달성을 목료로 뛰고 있으며 인도네이사 내수시장을 공략하기위해 '스포텍'이란 자체 브랜드를 개발해 현지 마케팅에 주력하고 있다. 91년에는 한국도자기 인도네시아 공장인 'P.T. 한국세라믹 인도네시아' 공장도 설립해 현지 근로자 약 1천명을 고용 연간 2천만 달러의 매출실적을 올리고 있다.

한국세라믹 인도네시아에서 생산된 생활도자기중 80%는 미국, 이탈리아, 프랑스, 일본 등지에 OEM(주문자상 표부착수출) 수출을 하고 있다. 20%는 한국도자기의 자체브랜드인 '슈퍼본'과 '세인트제임스'로 인도네시아 현지에 판매하고 있는데, 앞으로 자체브랜드로 수출할 계획을 갖고 있다. 특히 천성호씨는 회사에서 필요한 원·부자재를 모두 한국에서 조달할 정도로 한국경제 활성화에도 도움을 주고있는 참 기업인이다.

흔히 성공했다고 인정 받는 사람들에게서는 부지런하고 또 바쁘게 생활해 온 것을 발견할 수 있듯이 천성호씨 또한 예외는 아니다. 뛰다 못해 날라다닌다고 할 정도로 생활하고 있다. 그런 모습은 자연스레 자식들에게 투영돼 천성호씨와 부인 윤옥년씨는 인도네시아에, 큰아들 준범(20, 고려대 경영학과)은 서울에, 막내 석밤(18, 미국 코넬대 재료공학과)은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자신들을 채찍하고 있다.

특히 경영학도 큰 아들 준범은 아버지의 사업을 고스란히 물려받기 보다는 아버지가 그랬듯이 밑바닥(?)부터 배운 기업인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천성호씨는 외국에서 자라 겉보습만 한국인인 자녀들을 위해 진정한 한국인으로 키우기 위해 한국화 공부를 시키고 있고 한국을 좀더 배우라고 장남은 고려대 진학케 했고 보은인임을 잊지 않게 하기위해 자주 할아버지를 찾아보게 하고 있다.

그런 그의 아버지를 두 아들은 가장 존경한다고 말한다. 아들들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현재 민주평통 동남아협의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천성호씨를 보면서 바로 이사람이 애국자구나 또 지역을 사랑하는 사람이구나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의 살던 고향은 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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