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일씨, 법주사 공로패받아
상태바
조성일씨, 법주사 공로패받아
  • 보은신문
  • 승인 1995.06.10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6·25때 문화재 사수한 공으로
〔내속〕해마다 이맘때쯤이면 죽은 동료들이 꿈에 생생히 나타나 마음이 아프다는 조성일씨(71, 내속 사내). 가족보다는 지역과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조성일씨가 전쟁이 끝나고 처음으로 45년만에 법주사로부터 문화재를 사수한 공로로 지난 6일 공로패를 받았다. 처음으로 공로패를 받고 적으나마 지역에서 당시 유격대원들의 공로를 인정해 주는 것이 조성일씨는 못내 기쁘다.

그는 6·25사변중에는 대한 청년단의 소대장을 맡아 대원들을 훈련시켰고 사변후에는 민간유격대원으로 법주사와 지역을 사수했던 속리산 유격대원중의 한사람이다. 6·25사변이 끝난 후 산속으로 들어간 인민군들이 마을로 내려와 무자비한 폭행과 인명살상을 서슴지 않고 민가를 습격하거나 관공서를 공격해 험준한 산악을 끼고 있는 속리산 주민들은 공비로부터의 위협속에 불안에 떨며 살고 있었다.

당시 조성일씨는 독자로 3남매를 두고 노할머니를 모시고 살던 가장이었지만 집보다는 지역을 사수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집을 비우기가 일쑤였다. 그런 가장이 비운 자리를 메꾼것은 부인 정순금씨(67세)였다. 노할머니 때문에 피난도 못가 인민군들이 젊은 부인들을 해한다는 소문이 돌아 신발도 못사신기고 맨발에 피가배인 어린아이들을 재촉해 말티재를 넘어 삼거리쪽으로 피신하던 얘기를 하며 눈물을 찍어낸다.

이렇게 고생을 하며 가족을 지켰지만 결국은 큰아들을 홍역으로 잃었다. 6·25 이듬해에는 노할머니마저 돌아가셨다. 공비들 때문에 장례도 밤에 치러야 했다. 그로부터 45년여가 흘러 지난 5일은 그 할머니의 제삿날이라 온가족이 모였다. 목숨ㅇ르 버리고 지역을 지킨 동료들이며 당시 고생담을 들려주는 조성일씨는 "지역의 사수 민간노병으로서 정부나 군에서 당시 민간차원에서 지역사수 활동을 했다는 것을 알아주고 기록으로 남겼으면 하는 바램"뿐이라고 말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