땜장이가 꿈이었던 발명가 류재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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땜장이가 꿈이었던 발명가 류재만씨
  • 보은신문
  • 승인 1990.04.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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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여건의 발명을 한 세계적인 발명가
국제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발명가 류재만씨(41. 산외 봉계리)는 발명가가 된 계기에 대해서 “초등학교 시절, 과학교사이신 김영기선생님의 ‘별명으로 황금동산을 만든다’는 말씀이 뼈저린 가난과 배고픔에 사무친 나를 감동케 했고 그것이 곧 계기가 되었죠”라고 말한다.

따뜻한 도시락을 끼니 거르지 않고 먹는 땜장이아저씨에 매료되어 땜장이가 되려는 단수한 희망만으로 공고 진학을 결행했고, 1학년인 14세때 농기구의 일종인 풍구를 발명해내면서 의욕이 붙자, 발명아이디어는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와 마침내 오늘날의 발명가로서 자리잡게 되었다고 술회하는 류재만씨는 30년 발명생활에서 3천여건의 발명을 해내, 1987년 우수 발명전에서 국무총리상을 수상하고, 1988년 국가대표발명작품으로 서독 IENA 국제발명전 금상, 1989년 미국 WIT 국제발명전 금상을 수상했으며, 1989년 4월21일 발명의 날에는 개인발명가로서 최고의 영예인 대통령상을 수상한 저력있는 발명가이다.

현재, 정부기관사업의 일환인 특허청 주최, 전국순회 강연회의 강사로서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는 류재만씨는 그가 경영하는 유디아 미네랄·유디아 산업사의 운영과 매일같이 강행되는 강연회에도 불구하고 항상 발명을 위한 명상과 연구·제작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그래서인지 류재만씨는 그 자신을 기업인이나 강사라기 보다 “어디까지나 발명가”라고 자평하고, 그의 강한 자부심과 사명의식을 “사후의 비문에 ‘이 사람은 평생을 발명가로서 살아갔다’고 적혀지길 바란다”고 말한다.

또한 류재만씨는 “우리나라는 쟁이나 장인을 무시하는 전통적인 풍조 때문에 치욕적인 역사를 겪었었다”고 평하고 “내고향 보은만큼은, 생산적이지 못하고 점차 소비지역화 되는 슬픈 현 시점에서 생산적 사고의 교육장으로 변모시켜, 보다 발전적인 지역으로 만들고 싶다”고 밝혀 그의 애향심과 발명에의 깊은 자부심을 함께 느끼게 했다.

9대를 의가(醫家)로 이어온 집안의 8남매중 장남으로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실종된 증조부님이 생전에 모아둔 한의학서적을 바탕으로 현대과학을 접목, 재창조사업을 벌이는 현재의 건미(健美) 제품업을 일종의 대물림사업이라고 말하면서, 앞으로도 대물림을 해주고 싶다는 류재만씨는 현재 부산에서 교사로 있는 부인 김금숙씨와의 사이에 보선과 웅선 두 아들을 두고 있다. TEL (02) 452-1562, 447-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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