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1월 해외여행 자유화가 발표되었다. 이에 앞선 수입자유화 조치로 80년대 초 미국산 과자와 거버 이유식이 쏟아져 들어왔다. 저금리, 저유가, 저달러라는 ‘3저 호황’에 힘입어 1986년 사상 최초로 경상수지가 흑자로 돌아섰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수입 과자와 이유식에 손댄 수입업자들은 큰 손해를 보았고, 그다음 순서로 들어온 냉동 쇠고기는 여러 차례의 오류를 딛고 그런대로 성공한 사례였다. 해외여행도 1987년 9월 이전에는 만 50세 이상인 자로 200만 원을 은행에 예치하고 3개월 이내에 귀국한다는 서약서를 제출해야 했다.
자유화 이전의 해외여행은 공무 이외에는 취업과 유학 목적이 전부였다. 여권 발급에도 반공교육 필증이 붙어야 했다. 해외에서 한국인의 납북과 조총련의 반한 활동에 대비한다는 명목이었는데, 수강료 3천 원을 내고 빡빡한 8시간 교육을 받아야 했다. 게다가 개인이 반출할 수 있는 외국환은 달랑 100달러였다. 엄격한 외국환불법소지죄가 여행자들을 떨게 하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남대문시장 인근에는 암달러상들이 많았다. 당시에는 국제공항마다 다양한 출입국 관련 부과금이 있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 초기에는 항공권 구입시 출국세를 별도로 납부했는데, 1997년부터는 항공권에 포함되었다. 입국비자 요금을 징수하는 공항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환승하는 공항에서 더러 공항이용료를 요구하기도 한다. 한국 여권 소지자는 현재 전 세계 192개국에 무비자로 입국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위상이 크게 신장된 까닭이며, 한국인 관광객들의 씀씀이가 큰 까닭이다. 2014년 9월 케냐의 목축업자 다니엘 올로마에는 평창에서 열리는 유엔 전문가그룹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 항공권을 구입했는데, 평창과 평양을 혼동한 여행사의 실수로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했다. 그는 무비자로 입국을 시도했다는 이유로 벌금 500달러를 내고 수 시간을 공항에 억류되었다. 싱가포르 창이 공항 개항(1981년) 직후, 자카르타 행하던 필자도 웃지 못할 경험을 했다. 대한항공을 타고 와서 인도네시아항공으로 환승하던 중에 생긴 일이다. 넓은 공항을 헤매다가 마지막 탑승 안내방송을 들으면서 헐레벌떡 환승 게이트에 도착했더니 1달러 공항이용료가 필자를 막아섰다. 예의 100달러짜리를 꺼냈다. 그런데 거스름돈 99달러가 없었다. 여직원이 양손 가득 거스름돈을 가져올 때까지 진땀을 흘려야 했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던 선배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해외여행이 흔치 않던 시기라 장거리 여행의 기내 서비스가 다양했다. 특히나 소주와 막걸리밖에 모르던 술꾼들에게는 새로운 맛과 다양한 색깔의 위스키를 두루 맛볼 천금같은 기회였다. 누구나 기내에서 먹고 마시는 것은 ‘몽땅 공짜’라는 사전 정보를 입수하기 마련이었다. 이것저것 눈에 띄는 대로 한두 잔씩 마신 선배는 다른 라벨의 위스키를 찾았다. 여승무원은 지체없이 새 병을 들고 와서 선배가 보는 앞에서 뚜껑을 따서 정중하게 서비스를 했다. 잔을 비우고 나니 곧장 1달러의 청구서가 등장했다. 새 병을 따는 승객은 1달러를 내야 한다는 설명이었다. 선배도 100달러짜리를 꺼내야 했다. 문제는 미국에 도착할 때까지 거스름돈이 돌아오지 않았다. 항공기가 공항에 착륙할 때쯤 되어서야 아까 그 100달러가 되돌아 왔다.
저개발국가에서 태어나 배고픔을 겪던 세대가 아직 남아 있다. 개발도상국으로 들어선 이후 그들은 밤낮으로 일했다. 1964년 11월 30일 1억 달러어치 상품을 수출하던 날이 바로 수출의 날이다. 옷가지, 합판, 가발이 40%를 차지했다. 와이셔츠 한 장의 뉴욕항 도착가격이 1달러였다. 지난 3분기 수출총액은 1850억 달러였고 9월의 경상수지는 134억 7천만 달러 흑자였다. 유엔 무역개발국회의는 2021년 7월 한국을 선진국으로 분류하였다.
선진국에 사는 우리는 그러나 험난하고 어두웠던 지난 세월을 몽땅 잊어서는 안 된다. 처칠이 말했다.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를 잃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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