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나무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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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 꽃
  • 양승윤(회남면 산수리)
  • 승인 2022.10.20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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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 당신께서는 요절하신 부모님에 대한 애모(哀慕)와 30대 한창나이에 세상을 떠난 아우님에 대한 연민과 함께 새어머니를 당신의 깊은 효심만큼 모시지 못했다는 자책과 회한으로 일생을 사셨습니다. 가족들이 모두 황망하게 떠나신 후, 드센 친척들에게 부대끼는 것이 싫으셨던 아버지는 종가의 대소사를 당신 보다 겨우 일곱 살 많으신 숙부님께 떠넘기시고 일찍이 고향을 뒤로 하고 경성으로, 그 후에 동경으로 유학길에 오르셨지요. 그리고 다시 고향을 찾은 것은 칠십 무렵이셨어요. 아버지께서 그토록 다시 고향에 애착을 가지셨던 이유는 당신께서 평생 고심하며 조상님들 모실 사당 자리로 봐두셨던 산수골 삿갓집 터를 둘러싸고 있는 대나무 숲 때문이었습니다. 50여 년 전 고향을 떠날 때 조용히 사라졌던 대나무 숲이 아버지의 귀향에 맞추어 그야말로 우후죽순으로 일어나 죽림(竹林)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아버지, 고향 집 가꾸신 이십여 년 동안 대나무 꽃을 보셨나요? 대나무는 좀처럼 꽃을 피우지 않지만, 꽃이 피기는 핀다고 해요. 개화 시기가 봄가을로 일정하지 않고, 개화 기간도 아주 짧다고 해요. 더욱이 꽃이 피는 주기는 10년이나 20년 길게는 30년 60년 120년에 한 번 돌아온답니다. 그래서 일생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신비한 꽃이라고 한다지요. 보통 꽃과는 달리 화려한 모양새나 색깔을 가지지 않은 대나무 꽃은 얼핏 보기에 억새 풀이나 보리 이삭 비슷하고, 또 어떻게 보면 벼꽃(稻花) 같아 보이기도 한답니다. 대나무 꽃 개화를 돌연변이라는 설명도 있던데, 꽃이 핀 후 대나무숲 전체가 한꺼번에 고사한다고 하네요. 당신께서 고향을 떠날 즈음에 고향집 대나무 숲이 꽃을 피웠던 게 아니었을까요?
   사서삼경을 통달하시고 일본 근세문학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셨던 아버지께서 대나무에 대한 인식이 한중일과 베트남 등 유교문화권에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짐작을 하셨겠지요. 그렇습니다. 대나무의 꽃말인 지조, 인내, 그리고 절개 등의 꼿꼿한 인간의 심성이 폭넓게 인식되고 있답니다. 소동파(蘇東坡)는 일찍이 ‘사람은 고기 없이도 식사를 할 수 있지만, 대나무가 없는 생활은 할 수가 없다. 또, 고기를 먹지 않으면 사람의 몸이 수척해질 수 있지만, 대나무가 없으면 사람들은 저속해 진다’고 설파했답니다.  
   가장 오래된 중국 고전의 하나인 시경(詩經)에 대나무를 군자의 상징으로 명시하였고, 유교의 가르침에도 대나무는 선비들의 지조를 가름하는 척도였다고 했습니다. 불교에서 대나무는 관음보살의 자비를 상징하며, 선교(仙敎)에서도 ‘수행의 증진’을 나타내는 척도로 보았답니다. 동양의 옛 가르침에 대나무가 빠짐없이 등장하는 이유는 대나무 자체가 곧고 정갈하다는 이유 이외에도 대나무 숲은 언제나 조용하고 깨끗해서가 아니었을까요. 아버지가 남기고 가신 고향집 대나무 숲도 꼭 그렇습니다. 잡풀조차 거의 나지 않는데, 산짐승들이 다녀간 흔적만 이따금 씩 눈에 띕니다. 
   큰 자식이 조금 아는 동남아에도 대나무가 그렇게 흔하답니다. 태국의 외교정책을 ‘대나무 외교’라고 해서 구부러지되 꺾이지 않는다며, 모든 패전국은 자신들의 적국이라고 말합니다. 인도네시아 속담에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와 같다’가 있습니다. 바람을 어려운 상황에 비유하여, 대나무가 거친 바람에 휘어졌다가 다시 일어서는 것처럼 난관에 봉착한 사람이 이를 인내하고 극복하는 것에 비유하고 있네요. ‘대나무 숲의 죽순’은 대나무와 죽순이 다르지 않다는 의미로 자식들은 부모를 보고 따라 배운다는 의미로 쓰이고 있고요. ‘부모의 자식 사랑은 끝이 없으나, 자식의 부모 섬김은 대나무 한 마디에 미치지 못한다’는 구절에 어느덧 팔십 줄에 들어선 자식은 목이 멥니다.       
   고향집을 둘러싸고 있는 대나무 숲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큰 사랑이셨습니다. 그리고 자식들의 부모님 섬김은 그 대나무 한 마디에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대나무 꽃을 보면 행운이 찾아온다고 했습니다. 아주 오랜만에 한 번씩 피는 꽃이기 때문이지요. 이 가을 끝에 혹시 꽃이 피려나 하고 아침마다 안경을 닦아 씁니다. 사람들 세상에 가까운 나무, 역사와 철학과 예술이 살아 숨 쉬는 나무, 온 힘을 다해서 숲 전체에 꽃을 피우고 모두 함께 죽는 나무. 아버지, 대나무는 바로 아버지 당신의 나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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