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리산 야생화〈7〉도라지꽃
희랍신화에서 도라지꽃은, 미모 때문에 불행해진 공주 프시케의 사랑의 갈망에서 돋아난 꽃이다. 프시케는 밤마다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사나이의 사랑에 도취한다. 정체를 봐서도 안되고 물어서도 안되는 터부가 있는 사랑이다. 참을 수 없이 보고 싶던 어느날 밤, 프시케는 터부를 깨고 촛불을 든 채 사나이의 얼굴을 보았다. 그가 쏜 화살을 맞으면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없게 된다는 날개 돋은 사랑의 남신 큐피드였다.큐피드의 옷에 떨어진 촛농이 단서가 돼 터부는 깨졌고, 큐피드는 두 번 다시 프시케의 침실을 찾지 않았다. 사랑에 멍든 프시케, 그 갈망의 눈물이 도라지꽃을 피웠다는 것이다. 안타까운 신화처럼 도라지꽃은 상처입기 쉬운 소녀가 애써 간직하려는 사랑처럼 차분하고 은은한 숨결을 느끼게 한다. 살포시 귀를 가져다 대면 울음 섞인 속삭임을 전해줄 것만 같은 꽃. 등산을 하다 무심히 만나게 되는 도라지꽃은 그래서 가슴을 설레게 한다. 혼자하는 사랑이 더 간절하고 가슴저리게 하는 절절함이 있듯, 홀로 피어 고고한 도라지꽃은 차마 손 댈 수 없는 고귀한 사랑의 전신이다.
볕 잘 드는 산야에서 나는 도라지꽃은 무더기로 피지 않는다. 요란하거나 강렬하지도 않아서 한국적인 매력을 흠씬 머금고 있다. 그래서 도라지꽃은 단아한 여성을 떠올리게 한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깔끔한 꽃, 거친 손끝이라도 닿는다면 금방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여리디 여린 감성을 지닌 꽃이다. "영원한 사랑" 이라는 도라지꽃의 꽃말이 그래서 더욱 애잔함을 주는지 모른다. 처서무렵의 청량한 풀벌레소리가 그 속에서 제 사랑의 곡조를 익히고 있을 것만 같다.
지난 7월 말, 충주에 있는 봉황휴양림을 찾은 적이 있다. 산책로를 살짝 비껴선 양지바른 곳에 누군가의 영혼이 묻혀있는 무덤이 있었다. 무덤 한 쪽에 홀로 피어있는 도라지꽃, 옆의 꽃대에는 아직 가슴을 열지 않은 꽃이 꽈리처럼 혹은 풍선처럼 잔뜩 부풀어 있었다. 별모양의 통통한 꽃이 어찌나 조심스럽던지 차마 손을 가져갈 수가 없어 눈빛으로만 인사를 건네고 돌아왔던 기억이 있다. 이처럼 심심산천에 고고하게 피어 그 아름다운 자태를 수줍음 속에 담고 있던 도라지는 그 효능이 널리 알려지면서 대량재배를 한 덕분에 요즘 우리네 식탁에서도 자주 만나게 되었다.
씹으면 쌉쌀하면서도 향긋한 맛이 입안에 가득배어나서 우리네 삶이나 사랑은 달콤한 맛만 있는 게 아니라는 진리를 일깨워주는 게 아닌가 싶다.
〈제공 : 속리산 관리사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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