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의 날' 유감(有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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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의 날' 유감(有感)
  • 최동철 편집위원
  • 승인 2010.04.01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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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는 나랏일을 근심하고 염려하는 우국지사, 무관의 제왕으로도 불렸다. 펜 한 자루로 촌철살인을 하며 세상의 정의와 도덕의 구현을 위해 불철주야 뛰어다녔다. 사명감과 선비다운 기개로 사회의 뭇사람들로부터 부러움과 예우를 받았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박봉에 허덕여야 했다.
가난했던 언론종사자들이 그나마 생활형편이 다소 피기 시작한 때는 아이러니하게도 언론통폐합이 단행됐던 80년 전두환 정권 때 부터다. 1도1사 원칙에 따라 신문, 방송이 통합되거나 문을 닫았다. 많은 언론인들이 직장을 잃었으며 일부는 삼청교육대에 다녀와야만 했다. 국민들의 눈과 귀를 차단하기 위한 채찍이었다.
권력과 금력이 희소성에서 비롯되듯이 언론 학살에서 살아남은 자들에게는 곧 당근이 주어졌다. 80년 12월 31일 제정된 언론기본법. 이 법 제4조에는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는 언론기업에 대한 조세상의 특혜나 재정상의 지원을 할 수 있다'고 되어있다. 뿐만 아니다. 제19조에는 '발행인 및 방송국의 장은 소속 언론인의 후생복지증진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하며, 사회적 지위와 품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상당한 보수를 지급하여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사기업 종사자들이긴 하지만 법률로서 '상당한 보수 지급'이 강제되어 있으니 당시 언론인들은 세금도 없이 매년 오르는 급료를 수령했다. 호시절 이었다.
더구나 주재기자 제도가 폐지됐던 시절이라 언론인의 희소성 가치는 매우 높았다. 언론기본법으로 신분 보장된 언론인은 마치 조선시대 암행어사와 비견될 만큼 정부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권력자나 진배없었다. 사소한 잘못이 지적된 1단 기사 한 줄에도 해당 공직자는 징계를 받거나 심지어 퇴직도 해야 했다. 당시 시대상이 이렇다보니 공인들은 직위의 높고 낮음에 상관없이 언론인들 비위 맞추기에 급급했다. 이렇듯 언어도단의 언론기본법은 87년 11월11일 폐지됐다.
88년. 올림픽 개최국다운 변신을 위해 1도1사 제도가 폐지되고, 주재기자 제도가 일부 부활됐다. '언론의 봄'이 찾아 온 것이다. 폐간됐던 신문은 복간이 됐고 또 창간도 붐을 이뤘다. 강제 퇴직했던 기자들은 복직이 됐고, 언론인들의 머릿수가 많아지기 시작했다. 희소성의 가치는 날로 떨어져 갔다. 언론창간은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주무관장은 중앙정부에서 지방자치단체로 업무가 이관됐다. 자치단체마다 나름의 색깔을 내세운 언론이 종이건 디지털이건 우후죽순 생겨났다. 언론인으로서의 자질이 있건 없건 누구나 언론인의 명함을 내밀 수 있는 시대가 됐다.
삼년산성에서 돌을 던지면 '기자 머리에 맞는다'는 우스갯말이 생길 정도로 많은 언론인들이 보은군에서도 활동한다. 한정된 공급에 수요가 많다보니 광고시장은 동이 났다. 극히 일부 언론을 제외하고는 다시 박봉시대로 회귀했다. 약육강식의 생존경쟁에 따라 찢어먹기식의 하이에나 근성을 보이다보니 어떤 이들은 언론을 '공공의 적'으로까지 명명할 정도가 됐다. 더구나 유일하게 언론인들의 가치를 지켜주었던 정보 접근 권마저도 요즘 인터넷에 밀려 의미가 없어졌다. 인터넷에 들어가면 온통 정보다. 경우에 따라선 언론인들 보다 더욱 빠르고 명확한 정보가 블로그, 트위터를 통해 올라와 있다.
하지만 일반인들은 매년 4월 7일이 '신문의 날'이란 걸 모르듯이 정보의 가치가 다름을 모른다. 디지털문화 속의 단순한 정보와 언론인들의 소명의식과 고뇌에 찬 한 줄의 기사는 당연히 다르다. 행간에 의미를 새겨 넣고, 잠을 설칠 정도로 기사비중을 저울질하며 고민과 망설임 속에 탄생되는 언론인의 기사는 인터넷 속 자료 제공 식의 뭇 정보와는 격이 다르다. 넘쳐나는 언론 홍수 속에 가치를 잃어버린 그래서 박봉만으로 품위를 유지하면서도 사명감에 불타는 언론인들에게 '신문의 날'을 맞아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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