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잃은 설움, 의로운 삶으로 일제에 항거한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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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잃은 설움, 의로운 삶으로 일제에 항거한 독립운동가”
  • 박진수 기자
  • 승인 2010.02.25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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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외면 문암출신 김창복 선생 일대기 세상밖으로...
▲ 원내 김창복선생
1910년 일본은 강압적으로 우리나라의 주권을 빼앗고 조선 총독부를 두어 통치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굴하지 않는 우리민족은 각지에서 의병활동, 애국 계몽운동 등으로 독립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런 가운데 산외면 문암리 출신 김창복 선생의 의로운 일대기가 빛을 보지 못하고 있어 독립운동이 후대에 전해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나라잃은 설움에 대한 국민의 분노와 저항심이 극에 달하고 수많은 애국지사들은 해외로 망명하여 무력 투쟁 또는 외교 활동을 통하여 국권을 되찾기 위한 독립 운동을 전개하는 중심에 김창복 선생의 일대기가 후손들의 입에서 전해지고 있다.
경주김씨 판도판서공 장유의 손으로 김창복 선생의 아들 김각희(76. 서울 성북구 길음동)씨의 증언에 따르면 “저희 김창복 선친은 일본의 침략에 항거하시다가 돌아가신 조부의 영향으로 17세에 보은군 산외면에서 담배농사를 짓는 분들이 1년에 한번씩 군청 담배조합에 농사진 담배를 바쳐 그 대금을 찾는 사업을 하시면서 그 자금을 독립운동자금으로 사용한 적도 있었으며 그후 일본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위한 삼총사(3형제)를 조직하여 나라를 걱정하며 항일 활동을 하신 바 있다” 고 말하고 있다.
이후 한국으로 건너온 선친은 일본에서 배운 직조업을 통해 고향 보은에 솜틀공장을 처음으로 세우시기고 했다고 한다. 당시 전기가 없던 시절에 대전시에서 전기를 끌어올 수 있게 한 장본인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김창복 선생은 다시 서울 인사동으로 이사해 일제치하에서 핍박을 받으며 굶주린 어려운 조선동포들에게 배급을 하다 들켜 일본순사에게 뇌물로 위기를 모면하시거나 수차례의 옥고를 감내하면서도 일제시대 인사동 “영창학교” 지정 양화부(미술 서양화)를 운영하시던 때에 당시 김두한 전 국회의원과의 친분을 비롯해 징용징집이 나오자 손가락을 자르며 징집을 거부하시기도 했다.
▲ 아들 김각희씨
해방이후 보도연맹이라는 사건에 연루되어 몰살당하는 민족의 억울한 죽음을 당하는 모습을 김창복씨의 둘째 아들 김각희씨는 어린나이에 직접 목격했다고 한다.
선친의 파란만장한 삶으로 인해 수차례의 고향을 오가는 이사를 겪어야 했던 김각희 씨는 비록 초등학교밖에 수학할 수 없었던 배움을 대신해 독학과 서당에서 한문을 익히며 군 재대후 선친의 삶을 묻어있는 성북구 길음동에서 지금까지 대한민국 1호 도장쟁이로 인장업에 종사하고 있다.
평생 자녀들을 향하여 “선한 끝은 있어도 악한 끝은 자신이 안받으면 반듯이 자손대까지 미치게 된다” 라는 특별한 교훈을 생각하며 수많은 사회봉사활동으로 지역발전을 위한 실천으로 선친의 의로운 뜻을 조금이나마 되새기고 있다고 김각희 씨는 말하고 있다.
/박진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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