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성 남녀 쌍둥이를 포함해 3남매 기르기 너무 바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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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성 남녀 쌍둥이를 포함해 3남매 기르기 너무 바빠요"
  • 최동철 편집위원
  • 승인 2009.12.24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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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송기, 박여하 부부
▲ 외손자 진웅을 안은 박심성(왼쪽)씨는 내년 4월 중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서 외손녀 효진, 효선 등 3남매를 딸 내외가 기를 수 있겠는가 걱정이 태산이다.
이날 밤새 눈이 많이 내렸고 바깥 날씨는 몹시 추웠다. 그래서 김송기(42), 박여하(32)부부가 사는 보은읍 이평 주공아파트에 들어서자 안경알에 김이 하얗게 서렸다. 유아원에 다니는 큰 딸 효진(3)양은 이상한 안경을 낀 방문객이 낯선 탓인지 얼른 외할아버지 박심성(62) 씨 뒤편에 가서 몸을 움츠린다. 하지만 생후 6개월째인 이란성 남녀 쌍둥이 효선, 진웅 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보행기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논다.
뭐든 두 개 내지 두 배다. 보행기도 두 대, 색깔만 다른 아동복도 두벌씩. 분유, 기저귀도 사용량과 가격 면에서 효진이 양육 때의 두 배. 노력은 두 배 이상. 어떤 때는 정신이 하나도 없다. 아이들 몸이 아프거나 한꺼번에 칭얼댈 때는 어찌해야 될 지 난감할 때마저 있다.
때마침 한국 정부가 1949년 이전 출생한 중국 동포(조선족)들에게 첫 입국 후 3년간 체류할 수 있고 또 3년 만기 출국 후 재입국 하여 비자 유효기간까지 체류할 수 있는 5년짜리 방문취업비자(H-2)제도를 시행했다. 따라서 여하 씨의 친정부모는 첫 아이 효진이 출산에 맞춰 한국에 입국할 수 있었다. 그리고 효진이 뿐만 아니라 쌍둥이 남매를 기르는 현재까지 뒷바라지를 몽땅 해주었는데도 그러했다.

# 내년 4월 중국으로 귀국하는 친정부모 때문에 아이들 양육걱정 태산

송기, 여하 부부는 지난 2003년 1월 18일 결혼했다. 혼인한 지 만 7년이 되어 가는데 아이들이 늦은 데는 이유가 있다. 이전에 가졌던 두 번의 아이 모두 불행하게도 자궁 외 임신이었다. 그래서 인공수정으로 효진이를 갖게 됐다. 그런데 여하 씨는 무남독녀 외딸로 성장했다. 혼자는 너무 외롭다고 평소 느껴오던 여하 씨는 남편에게 ‘효진이가 외롭지 않고 서로 의지하고 살게끔 동생 하나만 더 낳자’고 했다. 결국 하나만 더 낳으려던 두 번째 인공수정에서 뜻밖에 이란성 쌍둥이가 태어난 것이다.
쌍둥이가 나온 덕에 난리가 난 것은 오히려 효진이다. 혼자 독차지했던 가족 모두의 관심과 사랑이 쌍둥이에게로 옮겨갔다. 특히 외할아버지는 막내 남동생 진웅이만을 안고 산다. 효진이도 그 정도는 안다. 그래서 관심을 끌기위해 공연히 심술도 부려보고 심지어 쌍둥이에게 분유를 먹이면 자신도 우유를 달라 하고, 옷을 갈아입히면 자기도 입혀달라고 보챈다.
그래도 여하 씨의 친정아버지와 어머니 신순열(63) 씨가 식사를 준비하거나 아이들을 봐주는 등 여러모로 뒷바라지를 해주고 있어 그럭저럭 넘겨왔다. 문제는 부모님이 중국으로 일시 귀국한 내년 4월 이후부터다. 그 때는 아이들을 어떻게 양육해야 할 지 벌써부터 걱정이 앞선다.

# 처 할머니, 장인 등 한 지붕 아래 4대가 모여 사는 다문화가정

이렇듯이 아이들 3남매가 주인공인 집안에는 현재 4대가 모여 살고 있다. 여하 씨의 할머니 윤재연(85)씨도 모국을 방문하여 경로당을 오가며 노년의 생활을 즐기고 있다.
여하 씨의 원래 출생지는 중국 네이멍구(내몽고자치구)다. 내몽골자치구 동부 방향, 헤이룽장(흑룡강) 성 치치할, 하얼빈, 바이청시와 인접한 곳, 흥안멩 시에 조선족이 많이 산다고 한다.
여하 씨의 아버지는 네이멍구 내 정치협상위원회 비서장(한국 청주시 부시장 급에 해당)출신으로 조선족으로서는 고위직 공무원을 지낸 이력을 갖고 있다. 어머니 역시 교육청 산하 한국어 정치, 역사 전문 연구원(교수직에 해당)을 지낸 공무원 출신이다. 여하 씨가 외동딸인 이유도 당시 중국은 산아제한(두 자녀 이내)을 엄격히 펼치고 있었고 이를 시행하는 주무부서의 장이 아버지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하 씨는 내몽골에서 한족 교육을 받으며 몽골전통무용을 전공했다. 그리고 공직을 사퇴한 부모님을 따라 한국 기업들이 많이 진출해 있는 산둥 성 칭다오(청도)로 나왔다.
아버지는 이곳에 진출한 한국 식품회사에서 일을 했고 여하 씨는 유치원 교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국에 취업 차 나가있던 사촌오빠의 소개로 송기 씨가 칭다오에 왔다. 한국 드라마를 통해 고국생활을 동경해왔던 여하 씨는 송기 씨가 멋져 보였다. 두 사람은 곧 결혼식을 올렸다.

# 결혼 초 어려운 살림 속에서 성실한 남편 믿고 힘든 고비 넘겨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휴일인 토, 일요일이 송기 씨에게는 없다. 언제 호출이 올지 알 수가 없다. 항시 대기 상태다. 송기 씨는 현대가스에서 운반 일을 한다. 요즘같이 날씨가 추워지면 이상하리만치 가스일은 더 바빠진다. 그래도 요즘은 일할 맛이 나는 송기씨다. 효진이를 비롯해 쌍둥이 남매도 건강하게 잘 자란다. 장인의 도움으로 빚도 대부분 정리되었으니 미래에 대한 희망의 꿈도 일굴 수 있다.
결혼 초기에는 아내 여하 씨를 볼 면목이 없을 정도로 정말 어려웠다. 쌀 살 돈이 없어 라면만 먹는 날도 있었다. 꿈만 갖고 한국에 시집왔다가 상상이 깨져버린 여하 씨는 거의 매일 중국으로 돌아가겠다고 울부짖었다. 그러면서도 공장 일이건, 식당일이건 닥치는 대로 했다.
송기 씨는 형제자매 2남3녀 중 셋째다. 위로 누나와 형이 있다. 어머니 최효영(68) 씨는 인근 아파트에서 조카들과 산다. 사업을 하던 아버지는 부도가 난 뒤 쓰러져 13년간 병원신세를 지다가 돌아가셨다. 방황을 하던 송기 씨도 이래저래 개인 빚이 생겼다.
‘첫 딸은 살림밑천’이라더니 효진이를 낳고 나서부터 가세가 펴기 시작했다. 중국에서 온 여하 씨 친정부모는 ‘손끝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살던 딸’의 농촌지역생활에 가슴이 아팠다. 그래도 같이 살며 지켜보니 사위 송기 씨는 성실했다. 단점은 성격이 모질지 못하다는 것 뿐 이었다. 그래서 다소의 경제력을 지원해 주었다. 2006년 한국인으로 귀화한 여하 씨가 “사실 마음이 착한 남편이 저보다 더 많이 힘들었을 것”이라고 혼잣말로 되뇌었다.

글/사진 최동철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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