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칼로 일본군에 맞선 의사 석성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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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칼로 일본군에 맞선 의사 석성국
  • 보은신문
  • 승인 2007.08.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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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따라 목숨 끊은 부인 이씨의 행동도 귀감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보은군민들도 나라를 되찾기 위해 의연히 일어섰다.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자 숱한 보은지역 의사(義士)들은 항왜의 기치를 들었고, 이 중에서 석성국 의사만큼 의롭고 장렬히 전사한 이는 없었다. 석 의사는 그 부인도 함께 순절했다.

보은군 내북면 이원리. 이곳이 바로 석 의사가 외롭게 묻힌 곳이다. 그리고 석 의사가 짧은 생애를 산 곳이기도 하다.

석 의사는 정확히 언제 태어났다는 기록이 없다. 다만 충주 석씨이고 호명은 찬문이라고 기록된다. 석 의사는 어려서부터 기개가 늠름하고 의협심이 강했다. 석 의사는 각지를 돌아다니며 의병을 모집하는데 온 힘을 다했다. 때로는 풍찬노숙(바람을 먹고 이슬에 잠잔다는 뜻으로, 객지에서 겪는 많은 고생을 이르는 말)을 해야 했으며 왜헌들에게 쫓기기도 했다.

1907년 군대해산 이후 속리산중에 의병이 형성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생업을 버리고 한봉수의 참모장이 되어 회북면에 주둔한 헌병대를 습격, 방화하고 헌병을 사살하는 등 격렬한 전투를 전개하기도 했다.  1908년 적정을 탐색하기 위해 홀로 의진을 떠나 오대산에 이르렀을때 적 수십명에게 포위, 적의 총과 칼을 빼앗아 온 힘을 다해 항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결국 검거되어 온갖 고문을 다 받았으나 끝까지 굽히지 않고 결국 혀를 깨물어 끊고 말을 못하게 하고는 자신의 성기(性器)를 뽑아 자결했다. 이때 그의 나이 24세였다.

석 의사의 부인 성주 이씨는 부군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현지로 달려왔다. 그때는 칠흙같은 밤이었으나 이씨는 부군의 시체를 업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부군을 장사지낸 이씨는 얼마 후 스스로 목숨을 끊어 지아비의 뒤를 따랐다.

해방 후 석의사의 항왜 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원묘 옆에는 1968년 내북면애향동지회에서 묘비를 건립했고, 1963년에는 대통령표창, 1991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이병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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