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산 박문호 선생의 글읽는 소리 들리는 듯
삼문을 들어서면서 “공자왈, 맹자왈…” 유생들의 목소리 높여 글읽는 소리와, 호산선생의 위엄있는 기침소리가 강당 구석구석에 묻어있다 다시 깨어나 귓전에 들려오는 듯하여, 서둘러 뜨락을 올라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문고리를 잡고 강당의 문을 열어보니 귓전에 올리던 그 소리는 이내 사라지고, 찾는 이 없어 조용한 정적만을 간직한 강당 마룻바닥위로 서늘한 바람만이 휘돌아갈 뿐이다.예전엔 성리학의 거목 호산(壺山) 박문호(朴文鎬)선생의 문하에 들고자 수백의 제자들이 앞을 다투어 찾아들고, 그가 떠난 후에도 강당을 찾는 제자들이 줄을 이었었다.
그러나 그 제자들도 고인이 된지 오래, 초야속에서도 그의 학문의 경지는 널리 알려져 전국의 젊은이들이 학풍을 이어받고자 그의 문하로 몰려들었던 시절은 가고, 예나 지금이나 사방으로 재를 넘어야 나타나는 외골진 곳에 지금은 가끔 학계의 교수들만이 그의 학문과 그가 남긴 저서들을 연구자료로 찾기 위해 찾아볼 뿐이다.
보은군 회북면 눌곡리 126-3번지, 마을과는 좀 떨어져서 병풍처럼 둘러싼 풍산을 뒤로하고, 전면6 측면2칸의 팔작집인 목조와가(木造瓦家)가 위치하고 있는데 이것이 지방기념물 28호로 지정된 풍림정사(風林精舍)이다.
풍림정사는 조선말기 현종조의 성리학자인 호산 박문호선생(1846~1918)이 성리학을 연구하며 저술하고 후학을 양성시키던 곳이다. 또한 강당 뒤편으로 호산이 1889년에 후성(後聖) 주자(朱子)를 모시기 위해 건립한 후성영당(後聖影堂)이 있는데 이곳에 주자, 우암, 율곡, 남당의 영정을 봉안하고 있으며, 1928년 호산의 사후 그의 위패도 우암의 옆에 봉인하고 있다.
이곳에 호산의 영정, 지본묵화(紙本墨畵) 좌상(坐像)과 지본채화(紙本彩畵)입상이 있는데 이중 묵화좌상은 조선후기의 초상화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미술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조선시대의 마지막 성리학자, 호산 박문호.
그가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들을 가르쳐 인재를 길러내기 위하여 고종9년을 풍림정사를 건립하고 한말의 개화기와 수난기를 이곳에 묻혀 지내면서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하며 백여권에 달하는 문집과 저서를 남기고 후학을 길러내었다.
호산은 <심목성설> <인물성고> <고시정유고> <농학경제동이고> <호산집> <연보> 등 백여권에 달하는 연구저술을 남겼는데 이중 <연보>는 귀중한 사료로서 학술적 가치가 높으며 <여소학>은 그가 여성교육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껴 여성교육을 위한 소학책으로 저술한 것인데 이것은 매우 체계적이고 조리있게 엮어진 여성교육을 위한 교본으로서, 남성 중심의 봉건적 조선사회에 있어서 그의 이러한 생각은 새로운 근대적 정신에 접근한 선각적인 교육사상이었다.
이에따라 그의 독특한 교육철학은 일본학계에서까지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며 조선조의 마지막 성리학자였다는 점에서 조선말기 성리학의 동향을 알아보는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이렇게 주목받는 인물이 된 학문적, 인격적 성장과정을 살펴보면―
박문호는 1846년 3월1일 그의 고향인 눌곡리에서 태어났다. 호는 호산, 본관은 영해인데 어려서는 아버지 한담공에게 글을 배워 18세에 경서에 통달하였다. 19세때부터 호산은 학문과 덕망이 높은 어당 이상수에게 수학하여 과거시험 위주의 학문을 넘어 성리학의 심오한 철학적인 경지를 깨달아 열심히 탐구해나가 성리학의 거목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28세때에는 스승인 어당의 권유로 서울에 머물면서 위당 신헌의 자제들을 가르쳤는데 많은 젊은이들이 그에게 배우고자 몰려들었다. 호산은 이때 제자들을 열심히 훈도하는 한편 <학어편>과 <동국사략>을 집대성함으로써 본격적인 저술을 시작하였고 더욱이 13가지나 되는 경서를 모두 독파, 통달하여 그의 학문은 30이전에 이미 완숙의 경지에 도달했다.
호산의 유학사상은 율곡의 학설을 계승한 기호학파에 속하며, 인물성론을 깊이 연구하여 분주설을 주장함으로써 호론파의 이론을 심화 발전시켰다. 한말의 격동기에 처하여 외세를 배격하고 주체사상을 견지하면서 국운을 걱정한 우국지사이기도 하며, 조선말기 성리학의 새로운 발전을 가져오게 한 호산의 이러한 학문은 풍림정사에서 그 빛을 발해 그의 문하에서 4백여명의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
국운이 기울어져 가는 구한말에 교육으로 국가의 동량(棟粱)을 길러내야 하겠다는 일념으로 풍림정사에서의 그의 교육방법은 매우 엄격하고 철저하여 그 학문과 인격적 감화는 인근에까지 널리 파급되어 향풍순화(鄕風純化)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와같이 호산은 향리에 뿌리를 박고 향촌생활을 지도하면서 그 가운데 스스로 학문을 닦고 수양하며, 또한 독서한 교육을 실천함으로써 민족사회의 근간을 배양한 훌륭한 인물이다. 그러한 인물이 우리고장에서 배출되었다는 것은 우리고장 보은의 큰 자랑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이렇듯 고장의 자랑거리인 풍림정사가 78년 지방기념물로 지정되기 이전에는 강당이 영해박씨일가의 관리하에 있었는데 생활에 근근히 매달리다 보니 자연 관리는 소홀하게 되었고, 기와가 내려앉아 맞지않아 보기에도 흉물스러운 폐가인 채 방치되었었다.
이에 지방기념물로 지정된 이후 4차례에 걸쳐 도비와 군비의 지원을 받고 풍림정사 소유의 전답을 일부 매각한 기금으로 담장 보수, 외삼문 복원등을 하였지만, 지반자체가 습하고 물러서 가옥 전체가 가라앉아 문틀이 제대로 맞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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