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교육의 요람, 보은여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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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교육의 요람, 보은여중·고
  • 보은신문
  • 승인 1990.04.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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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남존여비(男尊女卑)사상이 사회적으로 깊이 뿌리박고 있었던 60년대 초, 여식(女息)에게 고등교육을 시키는 것은 어찌보면 선택받은 사람들에게나 있는 드문 일이었다. 특히 대대로 농사를 짓던 보은이라는 울타리에서는. 일찍이 여성교육의 요람으로 자리잡았던 보은 여자중고등학교는 29년동안 그들이 항상 지니고 다니는 장미처럼, 고운 향기와 미소를 지닌 한국여성들을 키워왔다.

1961년 보은 여자중학교 및 고등학교 설립인가를 받고 고등학교 3학급 중학교 6학급에 각각 보은중학교와 농고에서 여중고부를 인수받아 개교하여 오는 6월15일로 개교 29주년을 맞는 보은 여중고는 현재 과학실, 양호실, 가사실, 도서실, 미술실, 상담실 등 부속시설을 갖추고, 중학교 19학급 9백47명, 고등학교 9학급에 4백54명으로 총 1천4백1명의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부지런히 배우고 성실하게 행하며 슬기로운 성장을 위한다는 교육 목표아래 보은여중고는 교장 임호순씨와 교감 조준상(중학교)·이래철(고등학교)씨, 그리고 59명의 교사들에 의해 발전하고 있다.

“저는 보은중학교를 졸업했어요(7회) 그리고 농고 농업가정과에 입학하여 2학년까지는 농고생이었죠. 그런데 3학년이던 61년 5월에 여고로 분리되어 보은여고를 졸업하게 되었어요. 학교건물이 없었기 때문에 남자중학교 교실을 임시로 빌려서 배웠다”며 62년 2월9일 여고 1회 졸업생인 조금자씨는 어렵게 공부했던 당시를 회상하였다. 당시 주민들의 눈에도, 말이 여중고였지 모양을 갖춘 교실하나 없었고, 초대 교장도 농고교장 맹원영씨가 겸임했기 때문에 여중고의 존재를 깨닫지 못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시작되었던 여자 중고등학교의 독립은 61년 10월15일 보은 농업고등학교에서 교사 신축부지로, 현 교사리 116-2번지 6천2백66평을 인수받고 61년 11월21일 2대 교장으로 부임한 농고교장 노병건씨와 함께 학생들은 학교 만들기를 시작했다.

운동장 다지기, 화단정리, 담장 가꾸기 등 여중고 초기 입학생들은 학교 곳곳에 그들의 흔적을 새겼고, 더욱 여중고의 독립을 도와 왔던 것이다. 여고 4회인 방은자씨(42)는 “농고교실에서 수업을 받았지만 바로 옆에서 우리 학교가 하나 둘 제모습을 갖출 때 정말 기뻤어요. 사실 말이 여중고였지 교장선생님도 농고에서 겸임했고 수업도 농고에서 했으니까 어찌보면 당시 우리들은 농고 병설학교학생이라는 생각까지도 했다”고 말하고 그래도 열심히 공부했다고 했다.

한편, 총 동창회장을 맡고 있는 김영희씨(여중1회, 여고4회)는 “선생님들이 태부족이었기 때문에 한 선생님이 여러 과목을 가르칠 수밖에 없었지만 공부하는 분위기만은 진지했어요. 1학년들이 2, 3학년을 보면 인사를 하는 등, 상·하급생간의 위계가 잡혀있었다”고 회상했다.

62년 2월8일에는 보은 여중고 3대 교장 정찬홍씨가 부임했고, 다음 날인 2월9일에는 겸임 교장이 아닌 단독 교장아래에서 제1회 졸업식을 거행했다. 비록 농고 운동장에서 식은 거행되었지만, 여고 학적으로는 첫 졸업생이 배출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많은 눈물을 흘려야 했다. 그들이 입학해서 고생으로 성장시킨 여중고의 학교 모습, 지성과 덕성을 갖춘 여성으로 성장시켜 준 스승에 대한 고마움으로.

67년 9월8일, 여중 6학급에서 9학급으로, 69년에는 여고 3학급에서 6학급으로 인가, 또한 73년에는 중학교 17학급 고등학교 6학급 총 23학급이 인가되었고 같은해 12월4일에는 고등학교 각 학년당 2학급씩이 증설되어 12학급이 되었다. 개교한지 불과 10년도 채 안되 엄청난 학생수의 증가를 이룩한 것이다.

79년 12월28일 여중고 병설인데에서 여고를 분리시킬 방침으로 당초 여고부지가 마련되었다. 그러나 당시 여고에 취업반이 있었기 때문에 비록 여고부지로 마련되기는 했으나 여상을 설립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고 있었다.

또한 여상을 졸업하면 전원이 취업할 수 있다는 것으로 인해 급기야는 여상이 설립되었고, 그 때문에 80학년도 여고 입학생은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이듬에 81년 3월2일에는 보은여상에서 다시 보통과(진학반) 2학급 1백19명을 인수받았고 이 학생들이 83년 2월 보은여고 22회 졸업생이 되었다.

“처음에는 의붓 자식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여고 1학년으로 입학한 것이 아니고 여상 1학년으로 입학해서 다시 여고로 갔으니까 그로 인해 받은 정신적 피해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지요”라고 말한 여고 22회 졸업생인 박미림씨(동정국교 교사)의 말에는 무책임하게 행정을 펴는 당국을 나무라는 듯한 가시가 배어 있었다.

또한 88년 보은 고등학교가 남녀공학으로 전환되면서 보은여고를 폐지한다는 교육당국의 정책이 발표되어 여고에는 또 한번의 시련이 다가왔다. 이에 졸업동문들은 여고가 존립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들어 주민들의 서명을 받는 등 홍보작업에 들어 갔고, 결국 여고 존립에 대한 확고부동한 입지를 세우게 되었다.

그로 인해 90년 현재 29회에 걸쳐 보은 여중고를 졸업한 학생은 중학교 8천3백54명, 고등학교 3천6백94명으로 총 1만2천48명이 사회 곳곳에서 보은 여중고의 이름을 새기고 있다. 또한 전국소년체전 충북 평가전에서 종합 1위를 차지한 여중 양궁선수와 육상·탁구선수, 여고 육상선수들은 여중고의 명예를 어깨에 매고 달리고 있다.

90년 3월1일 9대 교장으로 부임한 임호순 교장은 “많은 학생들이 도회지로 가야만 좋은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내 고장에서 열심히 공부만 하면 얼마든지 훌륭한 대학에 갈 수 있어요. 여기에 있는 동안 일단 전학가는 학생이 없도록 하고, 꾸준히 실력향상을 시켜 명문학교로서 뿌리를 튼튼히 할 작정입니다.

올해 여중 1학급이 감소한 것도 전부 교육이라는 명목하에 전학간 이유이다”라고 설명하고는 우선 고장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학교가 살아있어야 된다고 역설했다. 이것은 바로 지난 88년 보은여고의 존폐가 논란이 될 때 여고가 존재해야 된다는 당위성이 있었던 것과 맥락을 같이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때 결성된 보은 여중고 동문회는 병설인 여고를 독립시키기 위해 다각도로 노력하고 있다. 그것은 과거 여성교육의 요람으로 전통을 계승 발전시켜 명문의 교육현장으로 영원히 보은지역에 존재하기 위함일 것이다.

지난해부터 입은 교복은 여중고 학생임을 더욱 뚜렷히 나태 나고 있고, 또한 29년 동안 선배들이 쌓아놓은 명문의 금자탑에, 후배들이 쏟아내는 해맑은 웃음 속에는 분명, 진한 향기가 배어나는 장미가 언제나 그 자리에 피어있도록 자리 매김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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