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 마을의 귀감, 내북면 봉황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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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 마을의 귀감, 내북면 봉황리
  • 김낙경(봉황리발전회 사무국장)
  • 승인 2025.08.14 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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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낙경(봉황리발전회 사무국장)
김낙경(봉황리발전회 사무국장)

“이웃과는 늘 형제처럼 화기애애하게 살아야 하는겨” 내북면 봉황리에서 언제나 들려오는 주민들의 목소리다. 
 청주에서 보은으로 30여분 달리다 보면 보은군의 첫 동네 산자수명(山紫水明)한 귀농귀촌 1번지가 봉황리다. 
 봉황리는 아주 오랜 옛날 상상의 새 봉황 한 쌍이 거울처럼 마주하고 있는 청벽산(靑壁山)에 살았다는 데서 유래했다 한다.
 봉황리의 또다른 이름은 ‘모래벌’ 이라고도 했지만 이제는 수초가 이곳을 차지하고 있어 세월의 변화를 느끼게 한다.
 속리산 천왕봉에서 발원해 마을 앞을 지나 남한강으로 흘러가는 마을앞 달천(達川)은 많은 종류의 물고기는 물론 수달도 서식하고 있는 생태의 보고다. 
 또한, 많은 스토리 만큼이나 마을 곳곳에 예로부터 불리었던 옛 지명들이 수두룩하다. 
 벌뜸, 주막뜸, 새집뜸, 군뜸, 돗대거리, 골안, 속질게, 호롱소, 원무릉이, 도매, 사평, 살목게, 풍언이, 작살래치기, 방죽들, 구들, 새들, 말목들, 질발비, 삼박골, 가는골, 매골. 곡골, 절터거리, 음달말, 방아다리, 속곳모랭이, 가마소, 시계바위, 치마바위, 홍두깨물, 솟구바위, 도리비, 신랑터, 살구재, 군지울, 병무안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지만 이제는 잊혀져 가고 있다. 
 이렇듯 다른 어느 시골 마을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명소와 특별함, 그리고 아름다운 경치와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누구나 살고 싶은 조건들을 다 갖추고 있어 귀농·귀촌 인구가 계속 늘고 있고 빈집이 없는 마을이 봉황리다.
 이 마을이 살기 좋은 또 다른 이유는 마을이 평화롭고 다툼이 없으며 정이 넘쳐난다.
마을발전회가 있기 때문이다. 
고향을 봉황리로 한 90여명의 회원들이 기존의 연반계(상조회)를 시대변화에 발맞춰 2019년 봉황리발전회를 결성했다. 
 선.후배간 유대강화를 토대로 고향 마을 현안에 대한 대처와 발전 방안을 함께 모색해 추진하며 마을 대소사를 함께 꾸려가기 위해서다.
 발전회의 이러한 역할과 순기능은 침체와 쇄락의 농촌 마을에 활력과 결속력을 높이고 귀농·귀촌 주민들과도 화합하는 동력으로 융화하고 작용하여 살기좋은 마을을 만들어 가고 있다.
 마을발전회는 매년 다섯 번 이상의 정기적 행사를 갖는다. 
년초에 선·후배간 1박2일 신년단합대회, 섣달그믐날(설날 전일)엔 정기총회, 이어 정월대보름 마을 행사, 그다음 망중한(忙中閑)의 단오날(음력 5월5일) 주민화합잔치, 7월 한여름 본동에서 갖는 하계단합대회 일명 ‘천렵’, 그리고 마을 긴급현안 협의 시 임시총회 소집 등으로 매년 발전회 주관행사를 통해 회원간의 유대와 친밀감은 더욱 높아지면서 올해부터는 모든 행사를 부부동반으로 넓혀 가기로 했다.
 실제로 7월 26일 가진 하계단합회에는 폭염도 무색하게 40여명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마을 다리 밑 물가에서 옛날 천렵하던 추억도 되새기며 마을을 위한 진지한 논의와 발전적인 방안들을 모색하는 모습은 인구소멸의 농촌 마을이 나아갈 모범적 운영 사례를 제시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봉황리의 또다른 특별함은 교회와 함께 근·현대사를 형성해온 마을이라는 점이다. 1925년 일제 강점기 때 故 김교동 장로님이 설립한 이래 올해로 100주년을 맞이하면서 마을과 함께 동고동락해온 교회가 100주년 기념식을 주민, 출향 인사 등 모두를 초청하는 마을잔치로 갖는 행사에 발전회는 후원금 100만원과 함께 회원들이 모두 참여하기로 결의하는 모습을 보더라도 봉황리가 왜 지역의 선도마을을 자부하는지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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