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적 설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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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적 설날
  • 나기홍 기자
  • 승인 2025.01.23 0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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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로부터 6일 후면 우리 민족 최대의 명절 ‘설’이다.
현재 우리 사회를 이끌고 있는 50~60대 국민들이 어렸을 적만 해도, 설은 우리 민족 최대의 명절이었다.
  70년~80년대까지만 해도 설날이 가까워지면 온 가족이 분주했다.
어머니 아버지는 설 명절 제수용품을 만들기 위해 떡 방앗간을 찾아 가래떡을 만들고, 안방에는 술을 담아 띄우며 맛있게 뜨기를 기원했다.
 부엌에는 가마솥 아궁이에 장작불을 넣고 잘 불궈 갈아낸 콩을 삼베에 넣어 두유를 내려받고 이를 솥에 부어 서서히 끓이다 간수를 넣어 두부를 만들었다.
 이를 지켜보는 어린이들은 “얘 바가지 좀 가져와라, 주적 좀 가져 와라”하면 후다닥 달려가 가져다주면 어머닌는 바가지에 순두부를 담아주며 맛있게 먹은 아이의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70년대에 초등학교를 다닌 이들의 한 가정 형제자매는 7~8명이 대부분이었다.
보은같은 농촌지역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이들 형제 중 4~5명은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중·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도시로 나가 공장이나 가정의 도우미 생활을 하기 일쑤였다.
  부모님과 함께 고향에 살고 있는 초등학교 2~3학년 동생들은 부모님의 설맞이 심부름을 마치면 객지에 나가 있는 형과 누나의 마중을 나갔다.
기다리던 버스가 뽀얀 흙먼지를 일으키며 도착했다.
 서울서 온 버스에는 사람이 가득했고 내리는 사람들을 하나, 둘, 셋, 넷, 스물, 서른, 쉰, 예순을 쉬어도 형과 누나는 보이지 않는다. 한숨이 나왔다. 그리고 또 기다렸다.
 두 시간 이상을 기다려 다시 도착한 버스에서 하나 둘 내리기 시작했고 하나, 둘, 셋, 넷, 스물로 차에서 내리는 사람을 세었다.
이 차에도 없으려나 했는데 누나가 나타났다. “누나~~” 형도 나타났다 “형~~” 우리 남매들은 얼싸안고 반가움을 감추지 못했다.
 형과 누나의 짐 보따리에는 부모님께 드릴 선물은 물론 어린 동생에게 줄 선물도 들어있었다. 두품한 나이롱 양말과 장갑이었다.
 현재 가격으로 3,000원, 1만원이면 살 수 있는 양말과 장갑이었지만 70년대말 까지만 해도 귀하고 귀한 것이었다. 
 아침이면 설 차례를 지냈다.
 아버지는 “홍동백서, 조율이시, 어동육서”라며 차례상에 차려지는 세찬과 세주를 꼼꼼히 살폈고, 우리 남매들은 아버지의 말씀에 따라 발 빠르게 움직여 차례상을 차렸고 설 차례를 올렸다.
 차례가 끝나면 우리 남매들은 아버지께 세배를 드렸고, 아버지는 이에 대해 덕담과 함께 종이 돈 10원씩을 손에 들려주면 큰 것을 얻은 듯 우리는 신바람이 절로 났다.
 아침 떡국을 먹고 나서는 이웃집을 찾아 어른들께 세배를 드리며 바쁘게 움직였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일년 동안 사용할 복조리를 사두고 2∼3개는 묶어 방에다 매달아 한 해의 행복을 기원했다.
그 기억들이 이제는 아련해져 가고 있다.
세월은 흘러 당시 부모님 나이가 된 우리가 부모님의 제례를 모시지만 요즘은 옛 정취는 찾아보기 힘들다.
찾아오는 가족은 한 두명에 불과하고 왔다가도 바쁘다는 핑계로 제례를 올리기 무섭게 휑하니 가버리는 것이 요즘 설 명절 분위기다.
그래도 설날이 찾아오면 즐겁고 정겹다.
평소 전화나 카톡으로 연락을 주고받던 아들, 딸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까치 까치 설 날은 어제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 이래요.”를 부르던 어릴적 설날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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