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궐터와 행궁터, 장안과 장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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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궐터와 행궁터, 장안과 장내리
  • 박진수 기자
  • 승인 2023.07.13 09: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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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은에서 속리산으로 향하다 보면 말티재를 들어서기 전에 만나는 마을이 있다. ‘행궁터’다.
 지금은 ‘대궐터’라고 쓰여진 표지석이 마을 이름을 대신하고 있다. 행정구역상은 장안면 장재리라는 마을이다. 이 곳 장재리는 ‘장자부리’ 와 한옥마을이 조성되어 ‘대궐터’라고 불리는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이곳이 ‘대궐터’라 불려왔고 보은의 웬만한 사람들은 ‘대궐터’라고 알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지난 정상혁 군수는 “장재1구는 1464년 세조의 속리산 행차시 복천암에 주석하던 신미스님이 이 곳 장재리 마을까지 마중을 나와 세조를 만난 곳이며 이곳에서 하루를 묵었던 행궁터라는 조선왕조실록 세조편에 근거해 이곳에 ‘행궁터’라는 표지석을 세운 바 있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다시 장재리 마을의 표지석 ‘행궁터’는 사라지고 다시 ‘대궐터’라는 표지석으로 바뀌어 세워져 있다. 단순히 주민들만의 뜻이라 생각기에는 너무도 비상식적이며 신중하지 못한 일방적 처사가 아닌지 의구심이 남는다. 
  국어사전을 살펴보면 대궐은 궁궐과 같은 단어로 대궐터는 평상시 임금이 사는 집을 말한다. 
 대신 행궁은 임금이 거동할 때 잠시 머무르는 별궁으로, 세조가 마음의 병을 치유하기 위해 찾아오던 법주사를 찾아오던 길에 신미대사의 마중을 받았던 곳이어서 행궁터로 이를 대궐터라 하는 것은 국어사전을 부정하는 비현실적 식견이며 역사를 부정하는 것 아닌지 아쉬움을 남긴다. 
 이러한 문제는 장재리 마을 뿐이 아니다. 예전 외속리면으로 불리던 곳이 이제는 장안면으로 바뀌어 불리고 있다. 외속리면과 장안면이 어떤 연고였는지 알아보았더니 단순했다. 장안면의 중심마을이 장내리라는 점과 1893년 동학농민군의 집결지였던 지금의 장내리와 하개리 마을이 8도의 백성 수만명이 모였다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장안으로 모이라면 “서울의 장안이냐, 보은의 장안이냐”라고 물었다는 것에서 장안이라는 말이 나오게 된 계기가 됐다.
 본래 장안(長安)은 중국의 장안이라는 지명에서 유래를 찾을 수 있다. 한때는 중국의 장안, 조선의 장안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여기서 장안(長安)과 장내(帳內)리의 장내는 분명 다른 의미를 두고 있다. 
장내리는 보습산 아래 삼가천 안쪽에 장막(帳幕)처럼 펼쳐져 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결국 장내리의 지형을 말해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장안면이라 불리면서 의미는 전혀 다르게 바뀐 것이다. 1893년 보은집회 당시 장안이라 불리던 곳은 장내리 마을뿐만 아니라 옥천군 청성면 한곡리도 역시 “서울의 장안이냐, 한곡리의 장안이냐” 라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여기에 지금은 예전 장내리로 불리던 행정명 역시 장안리로 바뀌어 불리어지고 있다. 더 이상 장내리라는 지명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아직도 보은의 지명에는 일제강점기의 잔재와 역사와 문화에 맞지 않은 지명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행궁터를 대궐터로 바꾼 것 역시 일제강점기에 일어난 역사의 비극이 아닌가 의심케 한다.
 한 시대만을 위해 만들어진 지명은 언젠가는 누군가에 의해 다시 바뀐다. 마을의 고유 지명은 마을의 지형은 물론 문화와 역사를 말해준다는 의미에서 보다 신중한 결정이 필요하다.
 한번 바뀐 지명을 되돌리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한번 바꾸자고 했다면 각계 각층의 의견 수렴과 역사적 고증이 선행되었어야 했다. 역사는 왜곡되서도 왜곡해서도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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