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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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장열 (사)한국전통문화진흥원 이사장
  • 승인 2023.05.04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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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날 생각이 나서 얼마 전에는 후암동 고갯길을 걸어보았다.
경상도 촌 녀석이 청운의 큰 뜻을 품고 상경하여 중앙부처 첫 공무원 생활을 시작한 곳이 후암동고개에 있던 5층짜리 원형건물 국방부 청사였다.
지금의 국방부는 삼각지로타리 이태원 쪽 높은 지대에 우람하게 서 있지만, 후암동 구청사에서 청사를 새로 지어 이사한 때는 1970년 9월이었다. 이사 날에는 많은 군용지엠시(GMC) 트럭들이 동원되었고 헌병백차가 앞에서 사이렌을 울리며 호송 했다.
신청사 주위에는 육군본부, 미8군, 국방부조사대, 중앙경리단, 보안부대 등 주요 군사시설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청사 창문을 통해 툭 트인 저쪽 남산 산꼭대기를 보고 있노라면 거대한 원통형의 ‘남산타워’가 나날이 조금씩 그 높이를 더해가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 후 후암동 구청사에 특별히 갈 기회는 없었는데 이제 와서 보니 옛 청사 자리에는 생소한 아파트단지가 들어서 있었다. 도로 양편에는 크게 변한 것 없이 나지막한 사무실 빌딩들이 띄엄띄엄 이어져 있고 대중식당들도 여러 채 있었다.
그 당시는 강남과 여의도 개발이 막 시작될 무렵이었는데 그 후 강남이 저렇게 발전했는데도 후암동일대는 전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다. 마침 점심시간이 끝나가는 때인지 길거리에는 삼삼오오 젊은이들이 저마다 손에 일회용 커피컵을 들고 어슬렁거리며 왁자지껄 한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대부분이 허름한 주변 식당에서 국물 있는 식사로 외식을 했을 것이다.
간혹 한두 명이 조용히 이빨만 쑤시며 걸어가는 이들도 있었다. 저렇게 여러 층이 있는 큰 빌딩에는 분명히 구내식당도 있을 법 한데도 기어코 밖으로 나와서 외식을 하는 이유는 뭘까? 메뉴라고 해봐야 특별할 것도 없는 김치나 된장, 두부찌개 등일 텐데...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점심은 이런 외식이 습관화된 직원들이 많았다. 매일 먹는 구내식당 음식이 지겨워서 바람도 쏘일 겸 “나가자!”하고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출장이 잦은 직원들과는 달리 종일토록 좁은 사무실에 갇혀 내근하는 직원들에게는 점심시간이 좁은 사무실 공간을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며 오후 일과를 위해 재충전할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점심은 “중식(中食)”이라고도 한다. 본래 인간의 하루 식사는 조석(朝夕)이 전부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조석 간 시간적 간격이 길어서 그 중간에 시장기를 면하기 위해서 간단하게 점심을 먹기 시작한 것 같다. 점심은 글자 그대로 점심(點心), 즉 마음에 점을 찍는 일, 먹었다는 마음만 가지게 하는 ‘간단한 식사’였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점심은 구내식이든 외식이든 간에 ‘간단한 식사’로 끝내는 것이 좋은 것 같다. 옛 어른들이 말씀하시던 “식충(食蟲)”은 피가 소화기관으로 몰리는 바람에 아둔하고 정신건강에도 좋지 않은 것, 특히 점심식사가 그렇다. 그런데 외식을 하고 사무실로 돌아가는 직장인들의 모습은 예전과는 사뭇 다른 것 같다. 그 시절에는 직장에서도 상하가 분명하고 상사가 두려운 존재였기 때문에 오후 1시에는 반드시 사무실에 들어와서 앉아 있어야했기 때문에 간단한 식사 후에는 쫓기는 듯 사무실로 들어오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회사에서도 ‘갑질’이니 뭐니 하면서 부하직원으로 함부로 대할 수가 없는 환경이고 보니 돌아오는 발걸음이 달라졌다. 저렇게 배를 앞세우고 뒷짐을 진채 어슬렁거리는 걸음은 예전에는 볼 수 없던 풍경이다. 21세기 스피드세상에서 직장인들은 오히려 여유있게 노닥거리는 특이한 모습이다.
전과 지금의 이런저런 만상을 떠올리다가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덧 나 혼자 뿐이었다. 그때 동료직원들은 모두들 어디로 갔는지 간곳이 없다. 순간 외로움이 몰려왔다. 나에게 후암동 고갯길의 점심시간은 아득한 추억으로만 남아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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