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 꽃 지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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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 꽃 지는 날
  • 오계자(보은예총 회장)
  • 승인 2023.02.02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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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변함없이 목련꽃봉오리 축소판 같은 아기가 선물포장 벗기듯 하얀 알몸을 조금씩 드러낸다. 아침에 눈을 뜨면 제일 먼저 인사 나누는 아가들이다. 쌀뜨물을 주면서 “굿모닝!” 인사를 하면 아가들은 더 탱글탱글하고 이파리들은 더 싱그럽게 답례를 한다. 하루를 활짝 열어젖히는 기분 좋은 시간이다. 
20여 년 전 내게 시집와서 정이 들고 동반자가 된 백동백나무에게 지난해 내가 하도 미안한 짓을 해서 더 정성을 쏟는 녀석이다. 나무의 성장에 따라 화분도 몇 년에 한 번씩 큰 것으로 교체를 하다 보니 이제는 겨울에 안으로 모시고 봄이면 바깥으로 내놓아야 하는 일이 버거워졌다. 미안하지만 바깥에서 겨울나기를 해보자 싶어 양지바른 담장 밑에 이불 대용으로 짚이 없어서 낙엽들 잔뜩 덮고 투명 비닐로 둘레만 감싸줬다. 2주 후 몇 십 년 만에 오는 강추위라는 뉴스를 보고 나는 그만 몸이 달았다. 혼자는 절대 어쩔 수가 없고 밤에 누구를 부를 수도 없어 안절부절 난감했다. 날이 새자마자 나갔더니 나를 원망하듯 이파리들이 배를 내밀며 살짝 뒤로 말려드는 것 같았다. 이튿날 간신히 안으로 들어왔지만 서서히 봉오리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나마 구정쯤에 살아남은 몇 송이가 꽃으로 피어나긴 했지만 싱그러운 기색을 잃고 입원실 환자들 같았다. “얼려서 미안해, 살아줘서 고마워” 연거푸 사과를 했다. 올해는 조금 엉성하지만 제 모습을 찾아서 좋다. 긴 세월 동고동락 하다 보니 녀석과는 사연도 많다.      
몇 해 전 어느 날 탐스럽게 싱싱한 하얀 꽃송이를 툭 떨어트리는 걸 보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평소 같으면 동백꽃은 왜 꽃잎이 싱그러울 때 떨어질까. 아깝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날은 뜬금없이 나도 이렇게 아까워 할 때 갈수는 없을까. 
전부터 많이 생각해보던 삶과 죽음에 대한 연결고리다. 세상에 태어나서 유년기 소년기 청년기 장년과 노년을 거쳐 마지막 문을 통과하는 삶의 수순일 뿐이다. 젊을 때 노후 준비하듯 미리 죽음의 준비가 있으면 훨씬 수월하게 갈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은 종종 하지만 그 준비란 게 숙제였다. 잠자듯 평화롭게 눈을 감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온갖 몸부림으로 발버둥 치며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도 있다. 아마 전자는 죽음에 대한 마음의 준비가 충분히 된 경우이고 후자는 세상 욕망 가득 안고 놓기 싫어 헤매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후자는 되지 말아야지, 그날 단단히 각오했다. 
이 숙제는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걸 누구나 안다. 마음을 씻자. 분노와 원망, 욕심과 욕망부터 버리자. 노력하지만 쉽지 않았다. 우선 욕망부터 포기했다. 살만큼 산 탓인지 어렵지 않았다. 욕심은 한보따리만 내려놓았다. 가슴이 조금은 후련한 걸 보면 그 한보따리의 무게가 꽤 무거웠던 것 같다. 나머지 욕심은 차츰 내려놓기로 하고 일어서는데 기분이 참 좋았다. 
버린 것보다 아직 남아있는 욕심덩이가 더 크지만 나날이 마음이 가벼워지고 있다. 
  하얀 동백꽃이/ 툭/ 겨울을 내려놓는다 / 아깝다 
  나도 욕심 한 보따리/ 툭/ 내려놓았다/ 시원섭섭 편안하다 
시를 쓰면서 또 욕심 한주먹 밀어냈다. 이렇게 조금씩 마음이 가벼워지는 중 주변 지인들은 애인 생겼냐며 나를 놀린다. 얼굴이 피어나고  밝아진단다. 역시 마음은 몸을 따르고 몸은 마음을 따른다는 이치를 실감하고 있다. 
떨어지는 동백꽃이 내 삶의 지표를 바꿔 놓았다. 이렇게 안정되고 편안 한 것을 왜 그리도 움켜쥐었는지. 가끔 마음을 비웠다는 말을 들으면 나는 반기를 든다. 오랜 수행의 과정을 겪은 성직자라면 모르지만 평범한 인간이라면 절대 마음을 비우지 못한다. 다만 마음을 바꿀 수는 있다. 늘그막이라 그런지 욕망은 포기가 어렵지 않았다. 헌데 욕심은 버리고 돌아서면 앞질러 와있다. 지금은 한보따리, 한보따리씩 뜯어내고 있다. 버릴 때마다 조금씩 가벼워진다. 죽음에 대한 준비가 바로 이것이다. 마음을 씻는 것. 내려놓기 어렵던 미움과 원망도 시작하고 보니 수월해 진다. 세상에 미련이 없으면 삶의 마지막 수순인 죽음도 편안하게 통과할 것이다. 동백꽃처럼 아까울 때 아니 지금 당장 떨어져도 조용히 잠자듯 눈 감을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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