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와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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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시
  • 박미림
  • 승인 2022.11.17 07:2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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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정어머니가 실버주택에 입주하신 지 두어 달이 지났다. 올해 구순이신 어머니는 꽤 적응을 잘 하시는 것 같다. 많이 망설이셨던 선택, 자녀들은 은근 걱정하고 있지 않았던가? 
  “어디가 천국인가 했더니 바로 여기네, 너희들 말 듣길 잘했어.”
 다행이다. 전화 목소리에 신바람이 묻어난다. 
 “때 되면 따뜻한 밥 주지, 재미난 것 공부시켜주지, 이보다 좋은 천국은 없지.”

 일제 강점기 초등학교 학력이 전부인 어머니다. 평생 자녀들 뒷바라지에 자신의 배움이란 꿈이라도 꾸셨으랴? 성격 활발한 어머니는 구순에 비로소 물을 만나신 것이다.
 “오늘은 시(詩) 선생님이 와서 시 공부를 했지.”
 막내딸의 안부에 신이 나서 하시는 대답이다. 명색이 시인이라는 나는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엄마, 시가 뭐래요?”
 “하하, 내가 뭘 알어. 그냥 개 머루 먹듯 하는 거지.”
 나는 쿡 쿡 웃음이 나왔다. 개 머루 먹듯? 내가 웃음을 그치지 않자 엄마도 따라 웃으셨다. 모녀는 전화 너머로 한참을 배꼽 빠지게 웃었다. 공부가 재미있다는 당신 말에 너무 많은 걸 기대한 것이었을까? 우문현답이 아닐 수 없다. 단 몇 번 시 공부를 했다고 구십 할머니가 시를 쉽게 정의할 수 있겠는가? 지금껏 시 공부를 놓지 않는 욕심 많은 나도 시 앞에서는 늘 작아지기만 한데 말이다. 그런데 어쩌나? 엄마는 시를 잘 쓰고 싶다고 하셨다. 옆에 앉은 짝꿍 할머니가 선생님께 칭찬을 많이 받는 걸 보고 부러우셨나 보다. 나는 전화 너머로 잠깐 개인과외를 해 드리기로 했다. 구십 할머니를 위한 시 특강이라니? 무엇부터 시작해야 하나? 
 “엄마, 시란 말이에요.”
 나는 시의 주제며 리듬이며 회화성을 이야기해 드릴까 잠시 망설이다 그만두었다. 상대는 구십, 시 문외한인 초보 학생 아닌가? 그럼 시의 주제를 뼈대라 하고 나머지를 피와 살이라고 쉽게 풀어 말해드릴까? 하지만 그것 역시 그만두기로 했다. 수강생이 아무리 의욕이 넘치기로 그건 무리다. 그냥 대충 ’하고 싶은 말을 쓰시라 할까? ‘하지만 그도 예의는 아니다. 보청기 필요한 귀를 쫑긋하고 잘 들으려는 열정적인 학생에 대한.
 하는 수 없다. 초등학생들에게 동시를 가르치듯 어머니에게 천천히 시 두어 편을 예로 들며 설명해 드렸다.
 “딸, 이제 알았어. 근데 잊어먹지 말아야 할 건데.”
 “엄마, 진짜 아셨다고요? 진짜죠?”
 “하하하.”
 이 몇 분간의 전화 강의로 왕초보 학생이 시를 깨달았다면 내 강의는 천하의 명강의가 아닐 수 없다. 나는 덩달아 신이 나서 내친김에 좀 더 전화 열강을 했다.
 “엄마, 살면서 아버지에게 속상한 거 많았잖아요. 그냥 솔직한 마음을 써 보세요. 또   큰 딸이 오늘 아침에도 냉장고에 우유랑 야쿠르트를 놓고 갔다고 하셨죠? 그래서 눈   물 났다고요? 그게 시에요. 그거 그대로 쓰시면 되는 거예요. ”
 엄마와 나는 웃음 반, 삼천포로 빠진 이야기 반으로 오늘의 첫 강의를 마쳤다. 아, 그 말을 빠뜨렸다. 가장 중요한 대목인데. 엄마! 생각 안 나면 그냥 아무 말 대잔치 하세요, 하하, 그래서 손가락에 힘이 붙으면 딸년이 잘못 알아듣는다고 아무 말 대잔치 하라고 무시한 것 속상한 마음도 솔직히 쓰시고요.
 전화를 끊고 생각해 본다. 배움이란 무엇인가? 시란 무엇인가? 그리고 언젠가 내가 쓴 <시의 정의>를 읊조려 보았다. 

야, 시인 친구 너 쇠죽 쒀 봤냐?/
지푸라기 작두에 숭덩숭덩/썬 것하고 마른 풀 북데기에/구정물 넣어/가마솥에 푹푹 끓이면/구수한 냄새가 난다닝께
암튼 말이여 시라는 것이/그런 쇠죽 같은 거 아니것냐구
밟히고 맺혀/빌어먹을 말 같은 것/팽 풀어/가슴팍에 끓이면/이상하지?/묘한 맛이 나
시랍시고 사이비로 한 줄/써 보고 이런 말 하는 거/시인 친구 앞에 예의가 아니다만
시가 뭐 그런 것 아니것냐 이거지----하략----
                                박미림/ -별들도 슬픈 날이 있다- 중에서

 복지관에서 구순의 노인들에게 시를 가르치는 목적은 무엇일까? 그들에게 신춘문예라도 당선되길 바라는 걸까? 분명 그건 아닐 것이다. 누구나 상처 없이 살아온 인생은 없다. 눈물과 한숨 없이 꽃길만 걸은 인생도 없다. 어르신들이라면 누구나 가시밭길을 헤쳐온 고단한 세월이 있을 것이다. 그 세월을 돌아보는 시간, 자기 고백을 통해 상처를 치유하는 차원일 것이다. 미움도 원망도 내려놓고 깃털처럼 가볍게, 행복하게.
 어머니가 인생의 후반, 시를 만난 것이 기쁘다. 평생 하고 싶은 것 마음껏 도전할 기회도 형편도 되지 못했던 삶 아닌가? 글썽이다 멈추는 힘, 그 명확한 지점을 찾는 것이 명시라 한다던가? 어머니의 시는 언감생심 명시일 리 없다. 하지만 당신은 이미 온몸으로 명시를 쓴 분이 틀림없다. 자식들로 인해 늘 글썽이다 멈춰야 했던 인생이었으므로. 아니다, 글썽이기보다는 주저앉아 울다울다 지쳐 멈춘 삶이셨을까? 그런 시라면 신파일지도 모르겠다. 어떠랴. 설령 당신이 시가 눈물로 너덜너덜 신파가 된들.
 배움은 소중하다. 아픔을 오래오래 만져주고 위로해 주는 노년의 시 공부란 더더욱. 
‘끌갱이 글씨’라며 웃는 당신의 시작 노트를 떠올려본다. “딸아, 들어볼래”?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더듬더듬 외시던 전화기 속 당신의 목소리를 생각해 본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시로써 고단했던 삶과 화해하려는 늙은 학생의 뒷모습이란. ‘개 머루먹 듯.’ 시가 뭔지 모른다고요, 어머니? 그래서 더 멋진 시인인걸요.
 늦가을 단풍잎이 참 곱다. 저 꽃자리 오래오래 머물 수 있으시길 빈다.
 
* 고단하게 살아온 이 땅, 모든 어머니들의 삶을 응원합니다. 또한 실버복지관 운영에 애써주시는 모든 분들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박미림(朴美林) 201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 <살림출판사> 어린이 책 공모전 당선, 2020년 <바다 문학상> 본상 수필이 당선, 저서로는, 동시집『숙제 안 한 날』『비둘기 선생님은 뭘 몰라』, 시집『별들도 슬픈 날이 있다』,『벚꽃의 혀』, 수필집『꿈꾸는 자작나무』등이 있으며  서울 돈암초등학교 재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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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림 2022-11-18 14:39:48
그동안 고향에 대해 감사한 마음들 많이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정성껏 원고를 실어주시기까지하니 이래저래 감사한 마음입니다. 고향의 발전을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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