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로효친, 부자유친 되살려야
지난달 모 방송국의 음악회가 음성 꽃동네에서 개최되었다. 워낙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프로그램이어서 인근 지역 주민들도 많이 참석해 대성황을 이뤘다는 언론 보도도 있었다. 그러나 이날 누구나 노인이 된다는 순리를 거스른 행동이 돌출, 유종의 미를 거두지는 못했다. 바로 치매를 앓고 있는 한 할머니를 꽃동네에 버리고 자식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한 것.이 할머니는 밤이슬을 맞으며 밖에서 하룻밤을 샜다. 먹을 것 안 먹으며 그렇게 정성을 들여 키운 잣기들이 이제는 병이 들었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헌신짝처럼 부모를 내팽개친 것이다. 하루만이라도 어버이의 높고 깊은 은혜에 감사하자는 뜻으로 만든 어버이의 날, 부모의 가슴에 달아드린 카네이션 꽃이 채 시들기도 전에 그 할머니는 자식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어처구니없는 일은 이외에도 비일비재하다. 외국에서 사는 자식과 떨어져 서울에 홀로 오피스텔에서 살다 숨을 거둔지 1주일 뒤에 발견된 사건도 있었다.
고독에 떨던 할아버지가 세상을 하직한 모습을 본 이웃의 한 주민은 외롭게 혼자 사느니 돌아가시는 편이 낫다고 말하면서도 자식들과 어울려 행복하게 살고 싶어했던 할아버지의 살았을 쩍 소망에 대해 빠뜨리지 않았다. 모시기 힘들다고 노인을 버리고, 자신들의 이익만을 쫓아 외국에서 생활하면서 부모에게 외로움을 안겨 주었던 그들도 분명히 노인이 된다. 이들은 피하고 싶어도 절대로 피할 수 없는 이 사실을 간과한 것 같다.
지금까지 부모들에게 한 행동을 자식들이 그대로 배워 나중에 그들이 노인이 되었을 때 똑같이, 아니 더 깊은 외로움을 그들에게 줄 수 있다는 사실도 그냥 지나쳐 버린 것 같다. 한국에서 배워야 하고 또 타국인이 부러워하는 경로사상, 부자유친의 전통이 깨진지 오래다. 장남은 장가가기도 힘들다는 말이 이를 잘 말해준다. 또 장남인 경우는 스스로 결혼해서는 절대로 부모와 함께 살지않는다는 조건 아닌 조건을 내세우고 있다. 늙은 부모는 젊은이들에게 처치 곤란한 짐짝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나마 늙은 부모를 필요로 한 때는 부득이 아이들을 돌볼 처지가 못될 때 정도다. 늙은 부모는 집에서 며느리를 수발하는 식모 버금간다. 밖에서 돈을 번다고 유세를 떠는 며느리 대신 설거지며, 빨래, 청소, 아이 예방주사까지 도맡아야 한다. 어쩌다 아이가 병이라도 나면 부모가 자식을 잘못 모셔(?) 병이 난 것처럼 모든 죄를 부모에게 돌린다. 그래서 몸이 아무리 쇠해지더라도 자식들 눈치 보느니 혼자 살겠다는 노인이 부쩍 늘고 있다.
도시의 공원에서는 외로움에 지쳐있는 그리고 자식들에게 눈치보며 근근덕신 목숨을 연명하고 있는 노인들을 볼 수 있다. 외로움을 달랠 수 있는 친구들이 많다는 것에 노인들은 그나마 행복해 한다. 농촌에 사는 노인들도 외롭기는 마찬가지다. 그렇게 보고 싶어하는 자식들은 이따금씩 찾아오고 그나마 바쁘다는 핑계로 아예 발길을 끊일 때도 있다. 농촌에 남아있는 부모는 쌀이나 기름, 고룻가루를 보내줘야 하는 일꾼에 지나지 않는다.
자식이 성장하면서 부모의 은혜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내가 쌀이 필요할 때, 아이 돌봐줄 사람이 필요할 때, 집을 봐줄 사람이 필요할 때만 부모로서 존재할 뿐이다. 노인이 맞는 현실이 너무 서글프다. 이러저러한 행태로 경로사상이 망가지고 있는 세태에 경종을 울려야 한다. 지금도 우리가 모시기 귀찮아하던 한없이 자애로운 우리의 부모는 홀로 고향의 빈방을 지키고 있다. 휴일 마나 차로 뒤덮인 유원지를 찾기보다는 우리의 부모를 찾자. 한없이 받기만 했던 정을 이제는 우리의 부모에게 주자.
<우리보은의 자존심 발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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