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의 발원을 따라 대청호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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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의 발원을 따라 대청호로 가는 길”
  • 박진수 기자
  • 승인 2019.01.17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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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의 명소(24) -대청호반길
▲ 대청호수 전경.

보은군 회남면 조곡리를 지나 ‘새청산’ 을 지나면 거신교가 나온다. 이 거신교는 조곡리와 사당마루라고 불리우는 회남면사무소를 비롯 학교등 중심 면소재지를 연결하는 다리로 길이 80m, 폭 12m 1980년 12월 건설됐다.
지금의 거교리는 것더리, 것다리 라는 명칭이 변해 지금의 거교리라 불리우고 있는데 이곳에 예전 사당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1980년 대청댐 담수로 일부가 수몰되었고 일부가 사당마루 뒷산으로 이주하였다고 한다.

▲ 남대문공원의 기념탑.

지금은 거교리의 중심마을로 면사무소, 회남초등학교, 우체국, 농협분소등이 위치해 있다. 사당마루의 사당은 한자로 사담(沙潭) 이라고도 표기하고 있어 수몰전 모래벌판이라는 고유명칭이 남아있는 듯 했다. 사당마루는 지금은 수몰로 사라진 본말과 개울에서 목욕을 하건 먹골, 논이 많아 논골(농골) 이라 불리던 마을은 사라지고 지금은 사당마루로 이주했다고 한다.
사당마루와 거교1구 입구에는 거교리 출신인 한철수효행 기녑비가 세워져 있다. 이 효행기념비 반대편으로 대청호수를 따라 조성된 사담길을 따라 걷다보면 남대문리에 위치한 남대문공원이 나온다.
회인면 용곡리에 위치한 호점산성의 남문이 위치한 곳이라 하여 회남면 남대문리로 불리우고 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만지동, 율곡리 일부를 병합하여 남대문리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제법 넓은 광장으로 조성된 남대문공원에는 대청호수를 전망할 수 있는 전망대와 이 지역출신 시인인 동덕여대 김사인 교수의 수몰 유래비를 비롯 시비, 조형탑등이 설치되어 대청호를 찾는 외지인들에게 수몰지역임을 알려주고 있다.
또 남대문리 북쪽에는 거구리라는 마을이 있는데 이곳에는 아홉명의 부자가 살았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남대문의 서북쪽에 있는 마을은 만지동, 만마루는 고려때 최영 장군과 연관된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다.

▲ 대청호 사담길.

남대문교를 건너서 회남면 대청호수를 따라 신곡리로 향하는 길과 옛 청원군 위치한 청남대로 이어지는 삼거리가 나온다. 지방도 509번을 따라가면 대통령 별장이었던 청남대가 나온다. 대청호 담수로 남대문리의 중심마을이 509번 지방도를 따라 형성 되었지만 예전엔 호수로 잠긴 곳에 마을이 많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571번 지방도를 따라 걷다보면 신곡리가 나온다. 신곡리 마을 역시 대부분의 가옥이 침수되면서 도로를 중심으로 윗부분에 있던 가옥만 남아 있다.
신곡리에는 비지정문화재인 어필각이 있는데 1756년(영조 32년)에 왕이 지은 글을 직제학 문명구에서 하사한 것을 현판이 있는 곳인데 지금은 보존되어 있지 않다고 한다.
또 한가지 안타까운 것은 양중지라고 불리는 북쪽에 우암 송시열 선생의 영당이 있었는데 1980년 대청댐 담수로 수몰되면서 그 흔적도 없어졌다고 한다. 이 영당에 있던 곳은 장이 설정도로 장터라고 불리었다. 지금도 신곡리 마을을 조금 지나면 양중지라는 지명이 버스승강장에 남아있다.
신곡리를 지나자 대청호수를 가로 지르는 큰 다리가 나온다. 바로 회남대교로 이 다리는 1980년 12월 총연장 450m, 폭 10m의 철근 콘크리트로 된 다리로 이 다리를 걷다보면 아찔한 공포감 마져 들게 한다.
이 다리가 건설되었을 때 ‘콰이광의 다리’ 라고 불릴 정도로 인상깊은 다리였다고 한다. 이 다리가 건설되고 삶을 비관한 사람들이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해 지금은 다리앞에 표지판을 세워 자살에 대한 충동을 막고 있을 정도라 한다.
회남대교를 건너면 지형이 마름처럼 생겼다고 해서 마름골이라 불리던 사음리가 나온다. 마을 대부분이 담수로 지금은 거의 마을 이름만 남아 있다.
이 마을에는 자연지형과 연관된 지명이 아직도 남아 있다. ‘달돋이 고개’ 는 달맞이를 하던 고개로 지금은 담수되었고 고개를 넘으면 덕을 받는다는 뜻으로 ‘떡고개’ 라고 불리는 이 고개는 고개 마루만 남아있다고 한다.
이 사음리라는 마을 이름보다는 어부동이라고 많이 알려져 있다. 예전 어부들이 많이 살았다고 해서 불리워지기 시작해 낚시꾼들이 많이 찾아오면서 사음리는 어부동이라는 낚시터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이 사음리에서 지금은 물 건너편에는 사탄리, 용호리, 분저리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지금은 대청호 담수로 아주 작은 마을이지만 예전 번성했던 그 시절을 상기하면 시냇가를 중심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이 그림처럼 펼쳐졌을 것 같았다. 

▲ 1980년대 건설된 회남대교.

사음리를 지나면 대전시와 경계를 이룬 회남면 법수리가 나온다. 이 법수리에는 원법수라 불리는 지금은 대청호에 담수된 마을로 예전에는 청원군 문의면 가호리로 건너는 나루터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571번 지방도를 경계로 산중턱에 아담한 모습으로 마을 형성하고 있다. 지방도 571번을 따라 가다보면 대전시가 나오고 법수리 마을 앞 대청호 물을 건너 예전 청원군 문의면으로 배를 타고 건너던 나루터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예전에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던 모습이 연상되고 있다.
대청호 담수로 삶의 터전을 떠나야 했던 수몰민들의 당시 심정은 헤아릴 수 없겠지만 옥토와 살던 집, 마을 어귀 둥구나무, 마을 전체를 뒤로 하고 떠나야 했던 그 심정은 대청호 푸른 물속에 그대로 남아 있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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