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의 삼산중 하나인 삼태기 모양의 금적산”
상태바
“보은의 삼산중 하나인 삼태기 모양의 금적산”
  • 박진수 기자
  • 승인 2019.01.03 13:5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보은의 명소(22)- 보배가 쌓인 금적산
▲ 삼승면 서원리와 선곡리의 배산 금적산. 

봉수대 및 문화유적 가득한 보배로운 '명산'

보은의 큰 삼산(三山)은 속리산, 구병산, 금적산이다. 이중 하나인 금적산(金積山. 652m)은 보은군 삼승면 서원리에 위치하여 남으로 삼태기 모양처럼 길게 뻗은 속리산과 구병산 사이에서 위치해 있다.
속리산은 아버지, 구병산은 어머니, 금적산은 아들산이라고 전해올 정도로 보은군의 대표적인 명산이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 금적산에는 “조선의 백성이 3일간 먹을 수 있는 보배가 묻혀있다” 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금적산 정상에서는 구병산과 속리산의 능선을 볼 수 있다. 산 정상에는 봉수대가 있었는데 옥천군 청산의 박달라산에서 연락을 받아 북쪽의 용산점 봉수대로 전하는 봉수였는데 조선시대에 없어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금적산 정상에 오르면 조망을 즐기며 쉴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동쪽으로는 속리산의 주봉인 천왕봉과 구병산이 한 눈에 들어오고 서쪽으로는 옥천군 방향으로 웅장한 대청호반과 장계국민관광지, 북쪽으로는 보은군의 넓은 평야지대가 발 아래로 내려다보인다.

▲ 선곡리 금화서원.

또 금적산 줄기에 자리잡은 금화서원으로 삼승면 선곡리에 있는 서원으로 1758년에 최운, 성운, 조식, 성제원, 최흥림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셔져 있다. 1967년에 복원하여 최근에 제법 서원의 규모를 갖추고 있다.
이 금화서원은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고종 8)에 훼철되었다. 광복 후 지방유림회에서 적극 주선하여 1967년에 복원하였으며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사우(祠宇)와 3칸의 강당, 5칸의 관리사 등이 있다.
사우에는 최운을 비롯하여 5인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강당은 유생들이 모여 강학하던 장소였으나, 지금은 제향 때 제관들의 숙소 겸 회합장소로 쓰고 있다.
해마다 음력 3월 중정(두번째 丁日)과 9월 중정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祭品)은 7변 7두(豆)이다. 재산으로는 대지 1,400여 평, 임야 38정보 등이 있다.

▲ 금화서원 옆 계당.

또 이 금화서원 인근에는 계당(溪堂)이라는 화순 최씨 종중 소유의 비지정문화재가 있으며 이 계당은 금화서원내에 있는 강당으로 계당 최홍림이 학문을 닦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최근 계당의 문화재적 가치가 인정되어 문화재로 지정될 전망이다.
이 금적산에는 애처로운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오랜 옛날 이 산에는 금송아지와 금비둘기가 살고 있었다. 금송아지는 금비둘기를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산기슭에 밭을 일구어 금비둘기가 좋아하는 여러가지 곡식을 가꾸었다.
양지바른 곳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바위아래 옹달샘을 파서 보금자리를 마련한 후 금비둘기에게 청혼하여 둘은 결혼을 하여 내외가 되었다. 금송아지와 금비둘기는 누구나 부러워하는 금슬좋은 한쌍의 부부로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해 불행하게도 금송아지는 밭을 갈다가 넘어지는 바람에 두 눈이 멀고 말았다.
그 후 금비둘기는 눈먼 남편을 위하여 열심히 봉양하였으나 금비둘기의 벌이로서는 도저히 금송아지를 충족히 먹일 수가 없었다.

▲ 계당옆 계곡.

그렇게 몇 해가 지나자 아내인 금비둘기는 차차 남편 섬기기가 고통스럽게 느껴져 자연히 짜증을 냈고 둘은 자주 다투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루 종일 남편을 위해 식량을 물어나르던 금비둘기는 마침내 “나두 이젠 도저히 못참겠어요. 당신을 위한 희생도 하루 이틀이지 허구헌날 날개 쭉지가 빠지도록 양식을 물어 날라도 배가 고프다고 아우성이니 이젠 정말 지겨워 못살겠어요. 난 나대로 갈 것이니 당신도 당신대로 살길을 찾아보세요” 하고는 금송아지가 울면서 붙잡았지만 매정하게 뿌리치고는 어디론지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앞을 보지 못하는 불쌍한 금송아지는 그 후 산기슭을 헤매며 아내를 부르다가 지친 나머지 그 자리에서 쓰러져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주인공들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여느 전설과는 달리 비극적인 결말이 특이한 전설이라고나 할까.
그 뒤부터는 금송아지가 죽은 산을 금적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금송아지가 죽을 때 머리는 북쪽으로 두고 꼬리는 남쪽으로 향하였기 때문에 지금도 꼬리 쪽인 옥천군 안내면 오덕리에는 사금이 많이 나오고 머리가 있는 북쪽인 보은군 삼승면 선곡리에는 부자가 많이 난다고 전해지고 있다.
금적산의 이름도 예사롭지 않지만 산세의 모습은 보은의 보배, 보은에서는 없어서는 안될 보배로운 명산으로 존재할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