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학교육의 산실 관선정, 그 명성은 영원한 보은의 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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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학교육의 산실 관선정, 그 명성은 영원한 보은의 자산”
  • 박진수 기자
  • 승인 2018.08.16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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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의 명소를 찾아서(20)- 복원될 그날을 기다리는 관선정(觀善亭)
▲ 관선정 조감도.

보은군의 대표적인 문화재중 중요민속문화재 134호로 지정된 선병국 가옥(우당고택)은 99칸 대저택의 한옥으로 유명하다. 이런 선병국가옥의 유명세에 밀려 솟을대문 앞에 있는 관선정기적비(觀善亭紀蹟碑)와 관선정 조감도를 바라보는 이는 그리 흔치않다. 지금은 그 모습을 조감도로만 대신하고 있지만 훗날 관선정(觀善亭)은 복원되어야 하는 보은의 소중한 문화재라는 점이다.

▲ 1986년 양장으로 다시 간행된 겸산집.

이 건물은 본래 선병국 가옥 솟을대문 남쪽 약300m 지점에 1926년에 창건해서 저명한 스승을 초빙하여 1944년까지 수학을 하다가 일제의 탄압으로 인하여 관선정이 철거 당하였다. 해방후 1945년 관선정을 다시 경북 서령으로 옮겨서 복원 수학하였고 또 다시 상주 화북면 동관리 선비산하(先비山下)로 옮겨서 1951년까지 수학을 하였다고 한다.
1926년부터 1951년까지의 수학(受學)과 학생(學生)은 수백명(數百名)이 되었다. 보은향교가 일본에 의해 폐교될 당시 관선정에서 학문을 이을 정도로 그 규모가 컸다고 한다. ‘착한 사람들끼리 모이면 좋은 본을 받는다’ 라는 뜻을 지닌 관선정(觀善亭)은 35평의 한옥 서당이었다. 이 관선정을 짓고 운영한 사람은 선정훈(宣政薰)은 약관 20세의 나이였다.                                           
경술국치(庚戌國恥)후 민족의 비운을 개탄하고 민족을 부흥함에는 교육이 앞선다고 생각하여 집 앞 동쪽에 관선정이라는 서당을 지었다.
관선(觀善)은 『예기(禮記)』에 사상관이선(士相觀而善), 곧 학자가 서로 본받아서 착해진다는 말에서 나온 말이다. 춘추(春秋)로 학생을 공모하여 명경과(明經科)에 준한 고사를 거쳐 입학 허락된 자에게는 학비와 숙식일체를 사재로 제공하였다. 1926년 봄에 보은향교의 학생을 관선정에 통합한 이래 1940년 전시하의 악조건으로 사업이 중단될 때까지 변동없이 후학양성을 계속되었다. 아무리 부자라고 해도 자신의 재산을 털어가며 운영한다는 것은 분명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관선정을 거쳐간 스승을 보면 겸산(兼山) 홍치유(洪致裕) 선생이 시종 교수를 전담하였고 중간에 직암(直菴) 이철승(李喆承. 1879~1951)은 충남 서산출생으로 자는 중길(重吉), 호는 직암(直菴)이며 본관은 연안으로 일제 강점기 때 호서 지방에서 활동한 많은 항일 운동가였다. 저서로 『직암집 直菴集』이 있다.
이들은 분명 당대 최고의 유학자였다. 교과는 유학경전을 주로 삼고 시문저작(詩文著作), 국사(國史) 및 고례(古禮)도 함께 가르쳤다고 한다.
특히 당대 저명한 학자인 겸산(兼山) 홍치유(洪致裕) 자(字)는 응원(應遠), 호(號)는 겸산(兼山), 1895년(고종32) 명성왕후(明成皇后:민비)가 일본인에게 살해되자 이강년(李康년)이 영남(嶺南)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그의 종사관(從事官)으로 활약하였다. 한일합방(韓日合邦) 후 충북(忠北) 보은(報恩)을 중심으로 배일운동(排日運動)과 계몽운동(啓蒙運動)을 주도하였으며 그의 저서(著書) 「겸산집(兼山集)」이 전하고 있다.
이로 인해 관선정이 쏟아낸 재주 있는 인재만도 일천여명이 되고 추사의 맥을 이은 임창순 선생을 비롯, 나준, 변시연 등이 모두 관선정의 품안에서 학문을 완성하여 한학의 맥을 잇는 대학자가 되었다.

▲ 청명 임창순 선생.

청명 임창순 선생은 한학계를 대표하는 학자로서 재야에서 많은 후진을 양성하면서 우리 것을 지켜내기 위해 노력했다. 금석문·서예·그림·서지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왕성한 연구 활동을 했으며 통일 사회운동에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였다. 14세 때인 1927년부터 6년간 보은의 관선정서숙(觀善亭書塾)에서 한학을 배웠으며, 가정 형편이 어려워지자 대구로 옮겨가 노동일을  하면서 독학으로 국사와 국어 등을 꾸준히 공부했다. 8·15해방 후 중등교원 자격시험에 합격하여 경북중학교 교사가 되었다. 1946~49년 대구사범대학 전임강사, 1951~54년 동양의약대학(東洋醫藥大學) 조교수, 1954~62년 성균관대학교 부교수를 지냈다. 이곳에서 한문학의 주류를 형성한 청명(靑溟) 임창순(任昌淳·1914∼1999) 선생 임창순 [任昌淳] 1914 충북 옥천 출생, 1982년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의 대한민국미술대전 춘계 심사위원장을 맡았다. 1990~94년 한국서지학회 회장과 명예회장을 역임하면서 서지학회를 이끌었다. 1998년에는 한학 연구를 활성화하기 위해 사재를 털어 청명문화재단을 설립하고, 계간지 〈통일시론〉을 창간해 통일과 남북문제에 대해 관심을 표명했다. 저서로 〈한국의 서예〉·〈한국미술선집-서예편〉(1975)·〈한문강좌〉(1993) 등을 남겼고, 1999년 2월 당시(唐詩) 200여수를 우리말로 풀이한 〈당시정해 唐詩精解〉 증보판을 46년 만에 출간할 정도로 학문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다. 1979년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관선정에는 1926년부터 일제에 의해 강제로 문을 닫을 때인 1944년까지 온 나라 수백 명의 젊은이들에게 음식과 잠자리를 무료로 제공하고 공부하는 데 따르는 돈을 모두 사재로 충당하였다니 나라에서도 못할 일을 선생은 해낸 것이다.
관선정은 당시 일본이 강제 병합으로 한국인들의 역사와 민족교육이 서서히 말살되는 가운데서도 일제의 식민지 학교교육이 아닌 전통 유학을 교육시켜 은연중에 민족정신을 북돋우는 등 우리의 전통문화계승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과거 관선정에서 공부한 이들은 1973년 관선정기적비(觀善亭紀蹟碑)를 세워 관선정과 선정훈 선생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표하고 있다.
이 기적비에는 수강자 총인원이 백여명인데 재학기간이 최단반년부터 최장십년을 계속한 자도 있었다고 한다. 보통 5~6년 수학자는 대개 한학의 천문교양을 얻었고 국사와 선인들의 유저(遺著)를 통하여 철저한 민족정신과 항일의식을 키워온 민족교육이었다.

▲ 관선정 기적비.

현재 관선정의 그 모습은 사라졌지만 일부 출신 수학자들은 교육 및 문화 각계에서 다수 활약하여 민족문화 계발에 이바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선(善)의 씨앗만이 기쁨의 꽃을 피운다는 주자의 말씀을 실천했으면서도 자신을 세상에 크게 드러내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의 기억 속에는 선생에 대한 어떤 것도 외부로 나타나 있지 않다. 다만 주자의 위선최락(僞善最樂)이라는 현판이 선병국 가옥(우당고택)안채와 사랑채에 걸려 이를 대신하고 있다.
선정훈에 의해 지어진 선병국 가옥은 중요민속자료 제134호로 지정되어 더 이상의 훼손으로부터 보호는 받고 있지만 일제강점기 민족교육의 산실이었던 관선정의 옛 모습은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 명성에 걸맞는 복원의 그날을 기대해 본다. 
암울했던 일본의 치하속에서 관선정을 통해 선정훈이 추구했던 최고의 선(善)은 사라지지 않는 위풍당당한 우리의 한옥과 한학을 통한 민족정신을 영원히 보여주고자 했던 선견지명(先見之明)이 담겨 있다. 관선정은 비롯 지금은 조감도로만 명맥을 이어가고 있지만 언젠가는 복원되어 한학을 통해 인재양성과 교육의 중요성을 회복하려했던 그 명맥만큼은 보은의 명소로 손색이 없다. 복원될 그 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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