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물거리는 촛불이 창천(蒼天)에 비치구나[3] : 絶命詩 / 매천 황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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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물거리는 촛불이 창천(蒼天)에 비치구나[3] : 絶命詩 / 매천 황현
  • 장희구 (시조시인 문학평론가)
  • 승인 2018.08.16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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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149】

우리 역사에는 의절과 충절이 많았다. 국운이 바람 앞의 등불로 놓여있을 때 의(義)와 충(忠)을 보인 선현의 뒷모습도 만난다. 전쟁에서 이름 없이 죽어간 젊음을 한 송이 꽃에 비유했고, 행주치마를 입고 돌을 나르다가 죽어간 아낙의 애절한 사연도 눈시울을 적시게 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애절한 역사가 경술국치가 아닌가 싶다. 국운이 기울어 합방이라는 치욕을 보고 절명했던 선현 앞에 눈시울을 적시면서 읊었던 셋째 수를 번안해 본다.

강산도 찡그리고 무궁화도 시드는데
등불 켜고 책을 덮어 지난 일 회상하니
세상사 글 아는 사람노릇 이다지 어렵구나.
鳥獸哀鳴海岳嚬    槿花世界已沈淪
조수애명해악빈    근화세계이침륜
秋燈掩卷懷千古    難作人間識字人
추등엄권회천고    난작인간식자인

가물거리는 촛불이 창천(蒼天)에 비치구나(絶命詩)로 제목을 붙여본 절구 4수 세 번째다. 작자는 매천(梅泉) 황현(黃玹:1855∼1910)으로 전남 광양 출생인 조선 말기의 순국지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청년시절에 과거를 보기 위해  문명이 높던 강위·이건창·김택영 등과 깊이 교유하였다. 위 한시 원문을 번역하면 [새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네 / 무궁화 온 세상이 이젠 망해 버렸어라 //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지난 날 생각하니 /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하기 어렵기만 하구나]라는 시상이다.
일본침탈 근성은 1905년 을사보호늑약으로 본색을 드러내더니만 급기야는 1910년 한일합방이란 올가미 속에 주권을 빼앗아 버렸다. 매천은 이런 질곡의 시절에 살았고 가슴에 품은 울분을 터뜨리지 못해 스스로 자결한다.
어디 울분을 참지 못해 죽어간 선현들이 시인뿐이었던가. 수많은 지식인들은 자기의 뜻을 표현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극단적인 행동으로 그 의기를 표현했다. 교과서 한 자락을 장식하는 스승으로 자리하고 있다.
화자는 산천의 새와 짐승도 구슬프게 울고, 나라의 꽃인 무궁화도 벚꽃에 짓눌려 시든다고 했다. 절필(絶筆)의 변인가 했더니 절명(絶命)에 숙연해 진다. 후구로 이어지는 시인의 상상력은 [일찍이 나라를 지탱할 조그마한 공도 없었으니 / 단지 인(仁)을 이룰 뿐이요, 충(忠)은 아닌 것이로다 // 겨우 능히 윤곡(尹穀)을 따르는 데 그칠 뿐이요 / 당시의 진동(陣東)을 밟지 못하는 것이 부끄럽구나]라고 했다. 지식인으로서의 한없는 자책과 부끄러움을 드러낸다.
【한자와 어구】
鳥獸哀鳴: 새나 짐승, 海岳嚬: 강산도 찡그리다. 槿花: 무궁화. 여기서 ‘槿花世界(근화세계)’란 우리 나라를 일컬음, 已: 이미. 沈淪: 침몰. 몰락. // 秋燈: 가을 등불, 掩卷: 책을 덮다. 懷千古: 천년을 생각하다. 지난 날을 회상. 難作人間: 인간노릇하기 어렵다. 識字人: 글 아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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