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 정벌과 북방개척 공신이며 최고의 과학자 이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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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 정벌과 북방개척 공신이며 최고의 과학자 이천”
  • 박진수 기자
  • 승인 2018.05.17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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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기사 - 전쟁기념관 5월 호국인물 이천 장군 선정
▲ 지난 3일 서울 용산구 소재 전쟁기념관에서는 5월 호국인물로 선정된 이천 선생의 후손(종손 이헌영, 이홍식(전 보은군의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이천 장군의 현양행사가 개최됐다. 

서울 용산구에 소재된 전쟁기념관에서는 우리나라가 어려울 때 목숨을 바쳐 조국을 지키신 호국선열들의 위훈을 기리기 위하여 매월 호국인물을 선정하고 있는데 5월에는 조선초기 대마도 정벌과 압록강 상류의 북방개척에 크게 기여한 보은출신 이천 장군이 선정되어 화제가 되고 있다.
이천 선생은 본관은 예안이며 자는 자견, 호는 백곡 또는 불곡이며 고려말 1376년(우왕 2년)에 군부판서 송의 아들로 태어났다. 선생은 1402년(태종 2년) 무과에 등과하였고 1410년 무과중시에 거듭 급제하였으며 1420년(세종원년)에 동지총제로 있을 때 왜구를 맞아 이를 격퇴시켜 지대한 무훈으로 경상, 충청 양도 병마도절제사가 되었으며 그때는 병란 직후로 여러 서적과 인판본이 흩어지고 훼손되었을 때인데 선생은 종조참판이 되어 동활자 경자자를 만들었으니 극히 정묘했다. 이것이 세계 활자 출현의 시초이자 자랑이다.
그후 호조판서로 왕명에 의하여 의표를 창제하여 천문기를 완성하였으니 의표의 종류는 간의, 훈의, 규표, 종경, 천구의, 일시계, 자격루, 관측기, 천문력상, 측우기, 사신옥루 등의 기기로 그 규모가 정밀하였다.
1437년(세종 19년)에 평안도 도절제사가 되어 비변사를 겸임 총병력 7,800명 규모의 정벌군을 편성하였다. 이때 이천 장군은 정벌군을 이산과 강계 일대에 집결시켜 이만주의 근거지인 오미부를 비롯하여 우라산성남방 홍타리-아한-옹촌-오자점 등 적의 소굴을 기습공격하였다. 이로써 야인 46명 참살, 14명을 생포하여 그 공로를 인정받아 정헌대부 호조판서로 승진하였다. 또 함경도 도절제사로 전보하여 김종서와 같이 육진을 설치하여 서북간도 수천리를 개척하였다.
1451년(문종원년) 판중추원사로서 군국중사의 대공으로 일품에 올랐고 사기장의 영예를 입었으며 향년 76세에 세상을 뜨시니 철조삼일(공휴일)하고 관비로 장례를 모셨다. 시호를 익양이라 했다.
선생의 묘소는 보은 장안면 구인리에 있으며 구인리 대로변에는 세종대왕의 유서관과 선생의 실기비를 모신 추원각이 건립되어 있고 하마비가 세워져 있다.
이 추원각은 예안이씨의 선대 5위를 춘추로 제사 지내기 위해 구인리 송곡에 비를 세웠다가 1946년 현 위치로 옮겨 세운 것으로 2칸중 1칸은 세종대왕 유서판을 걸었고 1칸은 익양공 이천의 실기비를 건립하였다.
실기비는 1912년에 건립한 것으로 통정대부 전성균관 대사성 원임 규장각 직제학 조병즙이 짓고 숭록대부 전판돈령부사 윤용구가 쓰고 후손인 자선대부 시강원첨사 원임 규장각 직제학 정열이 전하고 있다.
이천 선생은 이번 호국인물 선정은 물론 한국을 빛낸 명예로운 과학기술인으로도 선정되어 조선 세종때 과학기술 발전을 주도했던 무관 출신의 과학기술자이다.
예안이씨 보은파종회 이홍식 전 보은군의원은 “이번 이천 선생의 호국인물 선정은 그동안 과학자로만 알려졌던 이천선생이 조선시대의 무장으로 나라가 어려울 때 목숨을 바쳐 조국을 지킨 호국선열로 가문을 넘어 보은을 빛낸 인물임을 증명하고 있다” 며 “장안면 오창리에 소재한 추원각의 유서관 및 실기비를 문화재로 재추진해야 한다” 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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