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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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의 죽음
  • 이장열 (사)한국전통문화진흥원 이사장
  • 승인 2018.03.15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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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욱(旭)군이 이 세상을 떴다. 친구가 무슨 일을 하고 사는지 잘 모르지만 나의 절친 정군이 업으로 하고 있는 이태원 골동상가 주위에서 그들 둘은 수시로 마주치는 사이였다. 그는 시류에 부합하는 정군의 처신이 마음에 안 들었던지 “태권이 너 그러면 못쓴다. 인생을 그렇게 살지마라!”하고 따끔하게 나무라는 올곧은 친구였다. 그러나 그의 생은 참 불행했다고 한다.
 나는 그가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소식을 듣고 찾아가본 적이 있었다. 병원에서 만났을 때 “장열아, 네가 왠일이냐?” 하고 너무나 뜻밖의 일이라면서 반가와 했다. 그간 자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친구는 줄에 매인 링거액 병을 높이 들고 문병간 친구들과 같이 병실 밖 휴게실로 나와서 한참동안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 수술이 잘못되어 재수술을 했다고 했다. 그리고 그 병원에서는 계속 사람이 죽어나간다고도 말했다. “어제도 한명 죽어나갔어.” 하는 그는 앞으로 닥칠 자기 운명도 모르고 있었다.
 그 친구의 문병을 다녀온 후 다시 방문하기로 마음먹고 나의 9월 22일 날짜 계획에는 “화욱이 문병ㆍ금일 장인 생신ㆍ윤의원등 식사...” 등으로 일정이 빽빽하게 잡혀 있었다. 덕분에 22일에는 친구의 문병을 가지 못했다. 23일 부터는 국정감사가 시작되어 또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화욱군은 23일에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22일에 마지막이라도 문병을 가 보았더라면 … 하고 애석한 맘 그지없었다.
 이런 경우가 해외공보관에서 근무할 때도 있었다.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퇴원하여 집에 가있는 한 여직원을 문병가려고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서 집 주소를 물었더니 “××병원 영안실에 있어요” 하는 말을 듣고 화들짝 놀라고 맥이 탁 풀어졌던 기억이 난다. 병원에 입원했다가 사무실에 나온 그녀는 “암이었어요. 수술을 하고나니 기분이 날아갈 듯이 좋아요”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처럼 나는 항시 뒷북치는 2등 인생, 이것이 내 팔자인가 싶었다.
 친구의 장례식 날, 우리는 영구를 앞세우고 코스모스가 활짝 핀 ‘통일로’를 따라 벽제 공동묘지로 향했다. 벽제에는 화장터가 있으나 그를 실은 영구는 그냥 매장을 하는 장례의식으로 진행되었다. 그가 영면할 장소는 이미 구덩이가 마련되어 있었고 양편에도 역시 같은 구덩이가 두 개나 패어져 있었다. 같은 시간에 세구의 시신이 동시에 매장의식을 거행하는 것이었다. 마련된 묘지자리 위쪽에는 일하는 인부인지 모르지만 두명 정도가 앉아서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아마 흙을 덮고 뒷마무리를 할 인부 같이 생각되었다. 그 중 한 사람은 얼굴전체가 시꺼먼 암덩이 같은 살들이 울퉁불퉁하게 돋아나 흉측한 모습이 마치 저승사자 같은 모습이었다.
 친구의 하관식은 기독교 의식으로 진행되었다. 양쪽에서도 동시에 불교와 천주교 의식으로 하관식이 진행되었다. 모두 덮개가 열려있는 채로 기도소리, 불경소리 등이 서로 얽혀서 시끄럽고 어수선 했다. 드디어 관뚜껑을 덮으려는 순간이었다. 이제까지 뒤에서 조용히 흐느끼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그의 아들이 갑자기 짜는 듯한 작은 목소리로 “아빠, 빨리 나와!”하고 발을 동동 굴르며 두세번 외쳤다. 아버지가 아직 살아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자비하게 관 뚜껑은 덮혔고 그 위로 흙이 뿌려짐으로써 그의 이 세상에서의 삶도 깊은 땅속으로 묻히고 말았다.
 그렇게 친구는 정든 벗들을 놔두고 먼저 갔다. 아무것도 모르고 이 세상에 뚝 떨어져 피난길에 부모와도 헤어져서 동분서주 외롭게 살다가 혈육 한점 남기고 그렇게 떠났다. 길에는 그렇게 일생을 마친 조그만 새 한 마리의 시체가 가을햇빛을 받으며 활짝핀 코스모스 옆에 버려져 있었다.    친구야! 잘 가거라. 그리고 이젠 고통 없이 편히 쉬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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