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과 약속한 시간에 맞추어 장례식장엘 가니 한 낮이라 그런지 유족 외에는 조문객이 별로 없었다. 고인의 영정 앞에서 기도하고 향을 올려 명복을 빈 다음 미망인에게 위로의 말을 하고 있으니 몇몇 친구들이 함께 들어온다. 접대실에서 상을 마주하고 앉자 서로의 건강을 염려 해 주는 인사를 시작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술잔도 오가게 되자 살아온 세월이 그리 평탄치 못 했던 한 친구가 푸념을 늘어놓는데 그 것은 푸념이라기보다도 숱한 어려움을 견디며 살아온 지난 삶에 대한 원망도 이제 와서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으로 생각하니 지금까지 건강하게 살아 온 것만도 고맙다는 나름대로의 인생철학이었다. 나이를 먹으면 표현은 달라도 모두 철학자가 되기 마련이지만 그래도 친구의 죽음 앞에서 하는 푸념은 모두가 공감할만한 것이기에 너도나도 한마디씩 거들게 되었다. 겨울이 가면 봄이 오고 꽃이 피면 지는 것처럼 생명이 태어나면 반드시 죽는 것이야 변할 수 없는 이치임으로 누구도 피할 수는 없는 것이고 삶과 죽음이 순간이라 할지라도 그 순간은 내 생애의 모든 세월의 시간들을 지워버리는 것이기에 인간이 아무리 위대한 존재라 할지라도 결국 죽음 앞에서 두려워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신 앞에서 나약한 존재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지워져야 하는 내가 두려운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개똥에 굴러도 저승 보다는 이승이 좋다고, 그런데 가끔은 자신의 존재를 지우기 위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이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그들은 왜 그 두려움의 세계를 스스로 찾아가는 것일까? 그들에게는 두려움이 없어서일까, 아니면 그토록 자신의 삶이나 불행이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일까라는 생각도 해 보게 된다. 그러나 내가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것은 내가 죽은 다음 남아 있는 이들에게서 내가 잊혀 질 때 까지 또는 혹시라도 나를 잊지 않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의 기억 속에 내가 어떻게 남아 있느냐 하는 것이란 생각이다. 될 수 있으면 나를 빨리 잊어 주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좋은 기억으로 남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인데 그 것이 그리 쉽지 않으니 죽음보다는 그 것이 두려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흔히들 죽음에 대하여 말 하기는 순서가 없고 누구도 대신 할 수 없으며 연습이나 경험도 할 수 없으며 다시 올 수도 없고 또 아무 것도 가지고 갈 수 없다고 함으로 비우는 삶이 오히려 행복 하다는 가르침을 주기도 하는데 내 마음 속에 도사리고 있는 욕심은 원래가 고약한 놈이라서 나를 놓아주지 않고 죽는 순간까지도 함께 하려 할 터이니 우선은 이놈부터 쫒아 낼 방법을 찾아야 그 두려움을 덜 수 있을 것 같다. 두려움이란 언제나 무엇에 얽매여 있을 때 느끼는 감정이기 때문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인에게는 두려움이 없기 마련이다. 그리고 자유인이란 언제나 죽음보다는 삶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생각 하는 사람이라 했으니 삶의 가치를 가장 사랑 하는 사람이 참 자유인이란 생각도 해 본다.
절망이 죽음에 이르게 하고 또 단 하나의 희망 없는 마지막 절망이 죽음이라고는 해도 이 마지막 절망에도 소망이 있으니 내가 믿는 기독교의 진리가 그 것이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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