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유일 위안부 생존자, 이옥선 할머니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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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유일 위안부 생존자, 이옥선 할머니를 만나다
  • 보은여고 2학년 박서진, 추수민 1학년 정예원, 강지원
  • 승인 2017.09.28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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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행복교육지구 마을기자단>
2017년 10월 13일. 충청북도 보은에 소녀상이 세워지는 날이다. 충청북도의 다른 시·군보다 인구가 적은 편인 보은군에 소녀상이 먼저 세워지는 이유는, 충북에서 유일한 위안부 생존자이신 이옥선 할머니(90)가 계시기 때문일 것이다. 보은행복교육지구 마을기자단 학생들은 속리산 자락에 거주하시는 할머니 댁을 방문해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하였다.<편집자주>

역사의 산증인을 만나게 되었다는 긴장감과 아픈 기억을 여쭈어야 한다는 어려움에 얼어 있는 우리와 달리, 할머니께서는 먼저 우리에게 “궁금한 것은 없냐”며 말을 걸어주셨다. 질문하는 사람의 눈을 맞춰주면서 웃어주시는 할머니의 모습 덕분에 분위기가 부드러워졌다.
“할머니. 어떻게 그 고통스러운 곳에서 벗어나실 수 있었어요?” 어렵사리 질문을 던져 보았다. 할머니는 우리 학생기자보다 어린 나이에 만주에서 한 맺힌 3년의 시간을 보냈다고 하셨다. 해방된 후에 만주에 주둔하던 한국청년들이 모는 헌 차를 얻어 타고, 도착지가 어딘지도 모른 채 향하다 신의주에 도착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그 곳을 지나 고향인 대구에 도착했지만, 위안부를 향한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에 또 다른 고통이 이어졌다고 한다. 결국 고향을 떠나 정처 없이 걷다가, 보은까지 오게 되셨다.
연고가 없는 보은에서의 삶도 역시 어려웠지만, 보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살림살이도 얻었고 보은읍내에서의 생활을 거쳐 속리산에 정착하시게 되었다고 한다. 할머니는 우리를 보자마자 보은 사람들의 정에 대해 이야기 하셨다. “그래도 보은 사람들은 정이 많고 여러 가지로 많이 도와줬어”라며 지금도 여전히 보은, 그리고 속리산에 살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위안부를 다룬 영화 [귀향]을 보셨는지, 또 그 영화를 보시면서 할머니의 젊은 날을 얼마나 녹여 냈는지에 대해 물었다. 할머니는 일본에 대한 분노와 그들의 잔혹함에 대해 이야기해주셨다. 또 영화에는 일본의 잔혹함이 미처 다 담겨있지는 않은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영화 이야기에 이어 할머니께서 전해주신 일본군의 만행에 대해 이야기는, 차마 기사로 옮기기 어려울 정도의 잔인했던 이야기들이 많았다. 할머니는 말씀 도중에도 몇 번을 멈추시고 한숨을 내쉬셨다. “처음 일본군에게 만주로 같이 끌려갔던 사람 중에, 나이도 많고(20대 초반), 우리를 어디로 끌고가냐며 일본군에게 당돌하게 따지던 사람이 있었어. 그 이후에 헤어지고 나서는 못봤는데 살았는지 죽었는지 궁금하네.”라고 말씀하시는 할머니의 얼굴에는 모진 세월에 대한 회한과 사람에 대한 그리움을 함께 느낄 수 있었다.
할머니는 우리와 대화하는 내내 “아이를 많이 낳아야 해”라고 하셨다. 처음에는 무슨 말씀인지 몰라 어리둥절 하기도 했는데, 일본보다 사람이 적고 힘이 약해 우리나라가 당했던 설움이 반복되면 안 된다는 말씀이셨다. “젊은 인재가 나와야 나라가 부강해진다”라고 강조하셨다. 그동안 나라에서 받은 지원금을 꼬박 모아 2천만원을 학생들에게 기부하셨던 할머니는, 힘 약한 나라의 설움을 몸소 견뎌내셨음에도 우리나라를 원망하는 마음보다 아끼고 사랑하는 애국의 마음을 가지고 계셨다.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위안부 문제에 대한 역사인식이 많이 개선되었지만, 위안부 생존자의 동의 없이 협의된 한-일 위안부 협상은 할머니에게 큰 상처를 안겨 준 듯 했다. “돈은 필요 없어. 사과를 해야지”라는 할머니의 말씀에 두 나라 정부의 문제점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바뀐 정부에 희망을 걸고 있지만, 아직 확실히 바뀐 것은 없다”며 두고 봐야한다는 말씀하셨다.
우리는 일본의 과오에 대하여 왜곡되고 포장된 역사를 배우고 있을, 우리와 같은 나이의 일본 청소년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은 없으신지 물었다. 한참을 고민하시던 할머니께서는 “항상 마음 착하게 먹어라”라는 짧은 한마디로 일본과, 일본의 학생들에 대한 복잡한 마음을 정리하셨다. 수많은 격언보다 더 격하게 와 닿았다. 이 한마디에 할머니가 지금 까지 겪었던 일들, 인내하고 살아왔던 세월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문득, 할머니 집에 처음 들어서면서 보았던 태극기가 떠올랐다. 국가기념일도 아닌데 홀로 나부끼던 태극기, 그런데 조기로 달려 있었다. “고칠 수 있으면 높게 달고 싶은데, 내가 다리가 아프고 달아 줄 사람이 없어서 고칠 수가 없어. 고칠 수 있으면 좀 고쳐줘. 우리나라가 더 강해지라고 높게 달고 싶어”라고 말씀하셨다.
많은 사람들이 할머니의 과거에 대해 궁금해 하며 할머니를 찾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곳 할머니의 집을 방문에서 우리가 마주한 것은, 과거의 슬픔이 아니라 나라가 더 강해지기를 바라는 할머니의 바람이었다. 할머니는 30년 동안 우리나라가 강해지기를 소원하며 태극기를 걸어놓으셨다고 한다. 우리는 할머니의 남은 생애 동안 할머니의 마음에 무엇으로 보답할 수 있을까?
/보은여고 2학년 박서진, 추수민 1학년 정예원, 강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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