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에 집을 짓고 세월만 깊더니 : 感物 / 회재 이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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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에 집을 짓고 세월만 깊더니 : 感物 / 회재 이언적
  • 장희구 (시조시인 문학평론가)
  • 승인 2017.05.18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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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
모든 사물을 보면 느낌이 있게 마련이다. 불현듯 떠오른 착상도 있고, 전후좌우를 생각하다가 떠오른 착상도 있다. 이를 붓을 들어 써놓으면 글이 되고 감상적인 자기 생각을 감물(感物)의 입장에서 곁들여 놓으면 문학작품이 된다. 요즈음은 시적 대상이 복잡해졌지만 우리 선현들에겐 단순한 자연이 시심의 대상이 되었다. 손수 심은 소나무와 대나무를 보고 안개와 노을은 변하는데 청산은 변함이 없다고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자연 속에 집을 짓고 세월은 깊었는데
손수 심은 송죽(松竹)이 온통 숲이 되었구나
연하(烟霞)는 그 모습 변했어도 청산은 변함없네.
卜築雲泉歲月深 手栽松竹摠成林
복축운천세월심 수재송죽총성림
烟霞朝慕多新態 唯有靑山無古今
연하조모다신태 유유청산무고금

자연에 집을 짓고 세월만 깊더니(感物)로 번역해본 칠언절구다. 작자는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1491∼1553)으로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다. 1539년에 전주부윤이 되었고 이조·병조의 판서를 거쳐 경상도관찰사·한성부판윤이 되었다. 명종이 즉위하자 [서계 10조(書啓十條)]를 올리고 조야의 모범을 보인 후 벼슬에서 물러났다. 위 한시 원문을 번역하면 [자연에 집을 짓고 세월만 깊었는데 / 손수 심은 솔과 대가 온통 숲이 되었구나 // 아침 저녁 안개와 노을의 모습 변하여도 / 저 푸른 산만은 예나 지금이나 꼭 같아라]라는 시상이다.
위 시제는 [사물을 보고 느낌이 있어]로 번역된다. 다음은 회재의 덕과 학문을 기리는 찬시 한 수다. [자옥산(紫玉山) 시내 따라 철학 구름 따서 물고 / 서계십조(書啓十條) 죽장 삼아 새 조문 밝히시며 / 여명을 열어 제치라, 푸른 꿈도 따서 물라] 그는 향리인 경주 자옥산에 은거하며 학문에만 열중했다. √권력의 무상함을 느끼게 하는 한 시인을 만나는 듯하다. 시인의 위 시문에서 순수 자연시의 전형(典型)을 보이고 있는 듯하다. 자연에 집을 짓고 오랜 세월동안 그곳에 살았는데 손수 심은 소나무와 대나무가 온통 숲을 이루었다고 회고면서 송죽의 곧은 절개로 시상을 떠올리고 있다. √화자가 바라보는 송죽은 이처럼 선현들의 곧은 절개를 빗대어 나타내곤 했음 암시한다. 안개와 노을은 자주 변하지만 우뚝한 저 푸른 산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같다는 자연에 기초한다는 예를 보인다. 화자 자신의 곧은 절개는 물론 유배는 가지만 두 마음을 품지 않는다는 함성까지도 만난다.
【한자와 어구】
卜築: 집을 짓다. 雲泉: 구름과 샘. 곧 자연. 歲月深: 세월이 깊다. 手栽: 손수 심다. 松竹: 소나무와 대나무. 摠成林: 온통 숲이 되다. // 烟霞: 안개와 노을. 朝慕: 아침과 저녁. 多新態: 자주 새롭다. 有靑山無古今: 청산은 예나 이제나 같다(有: 있다. 靑山: 청산. 無古今: 예와 이제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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