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조화된 선조들의 삶이 담긴 우당고택(선병국 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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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조화된 선조들의 삶이 담긴 우당고택(선병국 가옥)
  • 박진수 기자
  • 승인 2017.05.11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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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보은의 명소를 찾아서(6)
▲ 선병국 가옥의 안채와 사랑채.
“연화부수형 풍수로 장수와 발복의 명당터를 만들다”
우리 조상들은 명당을 찾아 조상의 묘를 쓰고 집을 지었다. 이는 풍수지리의 기본이 되는 음양오행설은 양반, 평민 할 것 없이 오랜 전통속에 뿌리 내려 오고 있다.
보은에서 상주로 향하는 도로변에 위치한 선병국 고가. 최근 이 집은 선병국의 부친 선정훈의 호인 우당고택으로 이름을 변경했다.
▲ 솟을대문을 들어서 보이는 사랑채 전경.
현재 보은군 장안면 개안리 일대는 선병국 고가를 비롯 한옥촌이 형성되어 있다. 바로 선병국 가옥은 우리 조상님네들의 풍수와 음양오행설이 일치하는 명당에 자리하고 있다.
원래 선씨 집안은 전남 고흥에 살던 보성 선씨였는데 전국을 돌면서 집터를 찾다가 이속에 정착했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집터가 연꽃이 물에 뜬 형상인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어서 자손이 왕성하고 장수를 기원했다는 풍수였다고 한다.
집은 자오선을 중심으로 동쪽은 안채 구역, 서쪽은 사랑채 구역으로 나뉘어 졌다. 안채 구역은 서향으로 공자형(工字型) 안채를 세우고 그 앞으로 ㄷ자의 곳간채를 배치하고 있다. 곳간채에 이어 ㄱ 자의 문간채를 배치했고 안채 뒤쪽에는 낮은 담장을 두른 장독대가 있다. 원래 집은 日 과 月이 합했다는 용자형(用字形)을 으뜸으로 해서 쓰기 좋도록 했었다고 한다.
자고로 99칸인 집은 민가가 꾸밀 수 있는 자장 큰 사치였다. 하지만 선병국 가옥은 곳간까지 포함해서 134칸이 넘었다고 한다. 이 집은 고종 30년(1904) 10월에 착공해서 국취를 지나 1925년에 완공되었다. 구한말 역사의 소용돌이속에서 무려 21년만에 선씨가 탄생된 것이다.
이 집의 재목은 속리산의 나무를 썼다고 하나 경북의 청화산 목재도 가져다 썼다고 하고 문을 짠 나무는 경북의 춘향목이라 했고 담장의 흙은 30리 밖의 마로면 구병산의 찰흙을 사용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담장을 만드는데만 3년 6개월간이 걸렸다는 이 집은 규모로 보나 견고함으로 보나 우람하고 아름답다는 표현이 적절하다.
▲ 동협문을 통해 본 안채 곳간채의 편문.
양반집의 상징인 솟을 대문을 들어서면 지금은 없어진 오른쪽으로 가리개담을 끼고 20m쯤 된는 중문이 있다. 솟을 대문은 원래 종이품 이상의 신분을 지닌 양반이 외바퀴 된 가마를 탄 채 그대로 들어갈 수 있도록 지붕을 높게 했다.
중문에 들어서서 안채가 보이고 안채의 오른쪽은 부엌이다. 3단의 다듬돌 바른층 쌓기의 축대에 공자형 집을 세웠고 기둥은 두루기둥(圓기둥)을 사용했다.
당초 민가에서는 두루기둥을 사용하지 못하게 했으나 왕권의 혼란으로 당대에는 많이 썼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기둥은 원래 원주와 방주가 있는데 보통은 방주를 썼으나 규모가 큰 집에서는 안채나 사랑채의 앞줄, 또는 대청앞의 기둥을 원주로 사용했다.
선병국 가옥의 사랑채 구역은 남향으로 공자형을 하고 있다. 본래 동남쪽에 연못이 있고 초당이 서 있었다고 한다. 안채와 사랑채를 출입하는 통로는 ㄷ 자 곳간채의 중앙에 있는 중문으로 출입을 사용했다.
또 사당을 출입하는데는 안채에서는 곳간채 북쪽을 지나 채마전을 거치고 또 뒷마당을 지나 통행했고 바깥채에서는 문을 지난 사당으로 들어가게 했다.
바깥마당은 솟을대문과 본채 사이에 있다. 대문에서 바깥마당을 지나 사랑채에 갈수도 있고 문간채를 지난 안채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솟을 대문을 들어서면 가리개담이 막혀 사랑채의 모습은 지붕만이 보일 뿐이다.
예전 가리개담은 담쟁이 넝쿨에 쌓여 잣나무와 조화를 이뤘다고 하고 연자방아와 디딜방아가 있었던 옛 모습을 1980년 발행된 “공간” 이라는 잡지에 당시 선병국씨는 증언하고 있다.
한국 고건축의 가장 아름다움은 날아갈 듯한 지붕선이다. 용마루와 처마선이 휘어져서 마치 나는 듯한 아름다움을 표현한 말이다. 팔작지붕은 지붕이 4면이며 양측면에 삼각형으로 되는 합각이 수직면으로 형성되어 추녀마루가 합각의 밑까지 와서 그치고 여기서부터 합각마루가 되어 용마루까지 오르는 것이다.
유연한 지붕선은 선씨가 안채의 배경인 구병산의 곡선과 조화를 이루고 사랑채는 뒷산인 옥녀봉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보습산 옥녀봉을 중심으로 좌우의 선이 사랑채의 기와선과 일치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연을 닮은 아름다운 명당임을 말해주고 있다.
팔작지붕의 유연한 선은 노년기에 있는 우리나라 산들의 원만한 곡선에서 유래됐다고 하나 버선코처럼 올라간 처마선은 우리나라의 건축의 상징이다.
선씨 고가의 들어 열개창은 「자연은 방안으로 들어오고 방안은 자연으로 연장되어 나간다」는 표현이 일치하고 있으며 현대건축에서 말하는 「상호관입성」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조상들이 만든 자연과 조화를 말해주고 있다.
▲ 사랑채의 대청마루에서 바라본 마당.
가리개담을 비롯 유난히 길고 많은 담은 3년이 넘게 걸릴 정도로 정성과 견고함을 느낄 수 있다. 굵직한 냇돌과 진흙이 섞이고 그 위에 기와를 얹었다. 보통돌이 많이 섞이면 돌담이고 돌이 적으면 토담이라고 했다면 선씨 고가는 굵직한 돌이 수없이 박힌 돌담이었다. 이처럼 선병국 가옥의 면모는 세심히 관찰하면 당대 최고의 기술과 시간을 들여 지은 구한말의 전통적인 주택임을 알 수 있다.
현재 선병국 고가는 중요민속자료 134호로 지정돼 문화재청의 관리, 보존해 나가고 있고 선병국씨의 후손들이 살고 있으며 고시를 준비하는 학생, 대학생들이 공부하는 고시촌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사랑채는 전통차를 마실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세월의 흐름앞에 예전의 모습은 아니지만 당대 최고의 목수들이 지방에 내려와 21년간의 공사를 통해 지어진 전통적인 가옥의 형태는 그대로 남아있어 한옥건축의 진수를 보여주는 소중한 우리의 문화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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