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북진기지 삼년산성
“1500년전의 유구한 문화유산, 보은의 미래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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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북진기지 삼년산성
“1500년전의 유구한 문화유산, 보은의 미래자원”
  • 박진수 기자
  • 승인 2017.04.13 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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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의 명소를 찾아서(3)
▲ 하늘에서 본 삼년산성.
보은읍 중심에 자리한 삼년산성은 서기 470년 신라의 북진정책의 일환으로 난공불락의 견고한 산성으로 축조되었다.
삼년산성은 해발 350m의 그리 높지 않은 오정산, 오항산이라 불리는 산정상에 1680m 의 고로봉 형태로 축조된 석축산성이다. 사적 235호로 지정된 삼년산성에는 역사적 기록과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 자비마립간 18년에 3년에 걸쳐 선산군 3천명의 군사를 동원해 축조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눌지왕 8년(486년)에 개축한 성으로 기록되어 있는 삼년산성은 산성의 기초, 벽쌓기, 돌 치성, 수문등이 원형으로 남아있어 우리나라의 최고로 오랜된 석축산성이며 우리나라 석축 산성의 시초로 평가받고 있다.
이러한 삼년산성을 축조한 신라와 백제는 고구려 세력의 남하에 공동으로 대처하기 위해 공수동맹을 맺고 많은 고구려와 전투에서 우호관계를 지속했으나 553년 7월 신라 진흥왕이 군사를 일으켜 백제의 동북 북경을 쳐서 빼앗아 신주를 설치하였다.
아찬 김무력(김유신의 조부)을 군주로 삼자 파국으로 치달아 마침내 백제 성왕이 신라를 치려다가 도리어 죽음을 당함으로써 적국이 되었다.
▲ 삼년산성의 무너진 석축.
다시 말해 백제 성왕 32년(554년, 신라 진흥왕 15년) 신라를 습격하고자 군사를 거느리고 관산성으로 쳐들어 오는데 구천(지금의 옥천 원정리 구진벼루)에 이르자 신라의 관산성 군주인 각간 우덕과 이찬 탐지등이 마주나가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므로 신주의 군주인 김무력이 주병을 거느리고 나가서 교전하면서도 고전하였는데 당시 삼년산군의 고간 도도가 급히 공격하여 백제 성왕을 살해하게 된다.
이로 인해 백제군은 대폐하여 좌평 4명과 군사 29,600명을 참살 당하니 백제군이 살아 돌아간 자가 없었다고 한다. 당시 백제 성왕을 살해한 고간 도도라는 장수가 인솔하는 삼년산성에 주둔해 있던 신라의 정예부대였음이 확인되고 있다.
이후 신라 태종 무열왕(7년) 660년 5월 김유신, 진주, 천존등과 군사를 이끌고 백제를 공벌하기 위해 도성을 떠났는데 경주에서 백제의 도성을 공격한 것이 아니라 지금의 경기도 이천 남천정으로 우회하였다.
6월에 태자 법민(문무대왕)이 당나라 소정방을 만나러 덕물도(지금의 덕적도)에 가서 작전계획을 상의하고 돌아온 후 남천정을 출발하여 황산벌로 나가는 길을 청주~보은 삼년산성~옥천 산계리 토성으로 보고 있으니 백제 공벌로써의 삼년산성의 중요성과 역할을 짐작할 수 있다.
660년 신라 (무열왕 7년) 7월 12~13일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백제 도성인 사비성을 점령하고 7월 18일 웅진성(熊津城)으로 피신했던 백제 의자왕이 와서 항복하자 7월29일 영동 백화산의 금돌성(今突城)에 머물러 있던 태종 무열왕이 사비성에 도착하여 8월2일 의자왕의 항복의식을 받는다. 9월 상순에 사비성에서 군사를 데리고 돌아오는데 그 직후에 백제의 남은 무리가 사비성에 들어와 백제의 항복에 살아남은 사람들을 모략했다.
이런 가운데 새로 부임하는 웅주도독(熊州都督) 왕문도(王文度)가 서라벌로 향하는 것을 알고 삼년산성으로 가서 왕문도를 맞이하게 된다. 신라 무열왕이 삼년산성에서 왕문도를 맞아한 이유는 삼년이나 걸려 쌓은 견고한 성곽을 과시하려는 뜻이 있었다고 한다.
9월 28일 왕문도가 삼년산성에 이르러 무열왕에게 조서를 전하는데 왕문도는 동쪽을 면하여 서고 무열왕은 서쪽을 면하여 서서 명을 전한 후 왕문도가 갑자기 병이 나서 죽자 함께 따라온 유인궤(劉仁軌)가 자리를 이어 행사를 끝마쳤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백제의 회복운동에 대한 대책이 논의가 있었다고 하며 이를 ‘삼년산성평정’ 이라고 한다. 이 평장의 결과로 태종 무열왕이 인솔한 대군은 사비성구원 해위작전에 전입되어 명실공히 백제공벌을 끝내게 된다.
또 삼년산성은 822년(헌덕왕 14) 웅천주 도독 김헌창(金憲昌)이 반란을 일으키자 국원(國原 지금의 충주), 서원(西原 지금의 청주), 금관(金官 지금의 김해)등 소경(小京)의 사신과 여러 군.현의 수령들이 가세하였는데 위공과 제릉은 자웅의 군사와 합세하여 삼년산성을 공격하여 적을 무찔러 이긴다음 속리산으로 군사를 내어 적을 격멸하였다. 이처럼 삼년산성의 견고한 성곽으로 반란군을 물리칠 수 있었던 사건이 있었다.
▲ 하늘에서 본 삼년산성.
세월이 흘러 928년 (신라 경순왕 2년)7월 고려 태조 왕건이 군사를 거느리고 삼년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청주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때 태조 왕건의 군사가 주둔했던 곳을 군장동(軍藏洞) 이라 한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고 이후 삼년산성의 존재가치는 반감되어 국경선에 위치했던 전초기지의 역할을 이미 끝나고 지역을 관할하는 산성으로 군창(軍倉)으로 모습이 바뀌어 간다.
이후 1549년(조선 명종4)에 삼년성 안에 삼년성서원이 창건되었고 1610년(광해군 2)사액(賜額)받은 서원이 위치하고 있었다. 1672년(현종 13)에 삼년산성안에서 보은현에서 동쪽으로 25리인 지금의 장안면 서원리로 옮겨 세웠다고 한다.
1500여년전 삼년산성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대부분 삼국사기를 토대로 전해지고 있다.
역사와 기록이 정확하고 수백년이 아닌 천년이 넘는 세월을 함께한 한반도의 유구한 문화유적으로 손색이 없다. 삼년산성의 역사적 가치는 보은을 넘어 우리나라의 대표적 문화유산으로 키워나갈 필요가 있다.
삼년산성은 보은 역사의 시작을 알리고 보은의 미래를 제시할 수 있는 미래자원인 만큼 그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활용방안을 강구한다면 최고의 관광상품이고 명소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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