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란사 저녁 풍경 앞에서 : 高蘭暮磬 / 상촌 신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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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란사 저녁 풍경 앞에서 : 高蘭暮磬 / 상촌 신흠
  • 장희구 (시조시인 문학평론가)
  • 승인 2016.01.21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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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78】
안타까움은 흥망성쇠의 아픔을 말해주는 백제 역사가 소실되고 없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그 역사의 흔적을 보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위례→웅진→사비}로 천도하는 과정에서 죽고 죽어가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중원을 다스린 백제의 역사가 ‘중국25사’와 ‘일본서기’에 나타나 있건만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백제 역사는 의자왕, 계백, 삼천궁녀 정도가 고작이다. 낙화암과 고란사를 찾아 애닲게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高蘭暮磬(고란모경) / 상촌 신흠
긴 연무 모래톱엔 초동목수 전조 알고
산 스님 혼자만이 흥망성쇠 상관않고
드맑은 풍경소리만 구름 밖을 날아올라.
水闊煙深沙渚遙 祗今樵牧認前朝
수활연심사저요 지금초목인전조
山僧不管興亡事 淸磬一聲雲外飄
산승불관흥망사 청경일성운외표

고란사 저녁 풍경 앞에서(高蘭暮磬)으로 번역하는 칠언절구다. 작자는 상촌(象村) 신흠(申欽:1566∼1628)으로 인조 때의 학자이자 문신이다. 개방적인 학문 태도로 양명학을 높이 평가했으며, 도승지, 병조 판서를 역임하다가 계축옥사 때 파직되고 인조반정 후 사면되어 영의정에 올랐다. 상촌집(象村集)이 전해진다. 위 한시 원문을 번역하면 [강 폭은 넓고 연무는 긴 저 멀리 모래톱에는, 지금까지 초동목수도 전조였음을 알고 있네. 산에 산 스님은 국가 흥망 상관 없다던가, 드맑은 풍경소리 구름 밖을 날아가네]라는 시상이다.
신흠의 문학론은 현대인들도 깊이 새길만한 대목을 발견한다. 시(詩)는 [형이상자(形而上者)]이고, 문(文)은 [형이하자(形而下者)]라고 하면서 ‘시’와 ‘문’이 지닌 본질적 차이를 깨닫고 창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시에서는 객관적 사물인 ‘경(境)’과 창작주체의 직관적 감성인 ‘신(神)’의 만남을 창작의 주요 동인으로 강조했음을 깊이 새길 말이다.
그래서인지 시인의 영감, 상상력의 발현에 주목하는 시론은 당대 문학론이 대부분 내면적 교화론(敎化論)을 중시하던 것과는 구별됨에 따라 현대인도 주목해야 할 대목이다. 고란사를 찾는 시인에게는 그 감회가 특히 남달랐음이 분명했음을 시문에서 찾게 된다.
화자는 멀리 흐르는 백마강 줄기의 백사장을 보면서 초동목수가 전조인 백제였음을 알고 있었을 터다. 지나간 역사와 흥망성쇠를 모르는 듯 고란사에서 은은하게 들려오는 풍경 소리만이 아무 꺼리김없다는 듯 구름 밖을 훨훨 날아가고 있다는 상상력이 많이 돋보인다.
【한자와 어구】
水闊: 강 폭이 넓다. 煙深: 연무는 깊다. 沙渚: 모래톱. 遙: 멀다. 祗: 조사(措辭). 今: 이제. 樵牧: 초동목수. 認前朝: 전조였음을 알고 있다.
山僧: 산승. 不管: 상관없다. 興亡事: 흥망의 일. 淸磬: 풍경 소리. 一聲: 한 소리. 곧 풍경소리. 雲外飄: 구름 밖으로 날아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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