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시안과 원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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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시안과 원시안
  • 시인 김종례
  • 승인 2014.07.31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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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지 <교육과 사색>을 정독하다 이달의 사색 한 구절을 우연히 접하게 되었다.
<부모는 자식의 미래를 바라보는 천리안을 가져야하며, 교사는 학생의 내일을 예견하는 원시안을 가져야한다> 이 구절을 읽으며, 나는 문득 나의 근시안에 대한 우려심이 생겼다. 어린 시절 노오란 개나리가 피어나면 봄빛에 빠져서는 온종일 울타리를 맴돌던 기억이 난다. 연분홍빛 진달래에 취해서 종일토록 동무들과 뒷동산을 헤매던 추억도 아직 생생하다. 여름이면 해님과 인사 나누며 아침마다 또또따따 웃어주던 나팔꽃도 가슴속에 또렷하다. 그렇게 단순하고 참신한 꽃잎에만 마음을 빼앗기던 유년 시절이 오늘 새삼 그립다. 여학교로 진학하면서 그런 토속적인 꽃들이 한없이 촌스러워 보인다고 구박을 하던 시절도 또한 있었다. 그런데 그 흔하디흔한 재래종 꽃들이 시력이 흐려져 가는 이 나이에 다시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하여, 어찌 이다지도 정겹고 친근감을 안겨주는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근시와 원시 사이의 착시 때문일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머지않아 그 비밀을 알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 생각된다. 밤하늘에 떠 있던 은하수의 황홀경에 잠 못 이루고, 비온 뒤의 무지개의 찬란함으로 가슴이 뛰고, 미풍에 흔들리는 아카시아 꽃향기 숲에 이끌려서 종일토록 서성대고, 휘영청 투명한 보름달에 속마음까지 투시될까봐 달빛 그늘에 숨어서 안도의 숨을 돌리던 젊은 날들! 내 위치에서 가장 가까운 실체들에 안주하고 사랑하지 못하고, 단순한 의식주의 해결보다는 허망한 꿈과 이상을 쫒아 밤을 지새우기도 하였다. 단순한 상황보다는 복잡한 것들에 대한 막연한 추측과 야망을 품으며, 태산 험곡을 넘나들며 위험한 곡예를 하기도 하였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시절 나는 지독한 근시안이었던 게 분명하다. 강물을 바라보며 반짝이는 수면의 아름다움만 볼 줄 알았지, 생계유지를 위해 차가운 강물에 시린 발을 담그는 이들의 고통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연인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사랑의 묘약에 쉽게 심취되기만 하였지, 그 눈빛 속에 감춰진 진실의 마음은 파악하지 못하였다. 어머니의 눈물을 바라보며 그저 따라서 울기만 하였지, 그 눈물 뒤에 숨어있는 회한의 그림자를 깨닫지 못했던 근시안을 이제사 채찍한다. 그리고 더욱 확실한 것은 근시안에 비추이던 실체들이 결코 내 영혼을 성숙시키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누구나 이렇게 갖은 고비와 역경을 조금씩 견뎌내면서 오르막 내리막을 반복하며 인생은 달린다. 이제는 내 생애 남은 날수를 세기가 더 쉬워진 이 시점에서 돌이켜보니, 젊은 시절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시야에 조금씩 들어오면서, 나의 근시안은 원시안으로 변하고 있다는 걸 문득 깨닫는다. 전에는 내 위치에서 앞쪽이나 가까이 있는 사람만 보였는데, 지금은 내 발치에서 먼데 있는 사람을 보려고 발뒤꿈치를 들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젊은 시절에는 주인공 여배우의 화려함에 이끌렸다면, 지금은 조연이나 스텝들의 숨은 노고에도 박수를 보내는 여유로움이 생겼다. 순탄하게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보다는 실패를 거듭하면서 칠전팔기한 분들의 이야기가 귀에 솔깃하다. 백화점의 현란한 불빛과 화려한 진열보다는 육거리 재래시장의 소란스러움을 재미있어 하는 요즘이다. 하루아침에 현기증 날만큼 높이 올라간 고층빌딩의 기세보다는, 무거운 골재를 지고 사닥다리를 올라가는 노동자의 굽은 등에 눈길이 가곤 한다. 언제나 방긋방긋 천사처럼 웃는 아기보다 까무러치게 울고 있는 아픈 아기가 더욱 애틋하며, 부부의 알콩달콩한 사랑 이야기보다는 꽃잎 같은 생채기 흔적들이 아름다워 보이는 건 또 웬일일까? 그리고 라일락 향처럼 신선하고 풋풋했던 근시안 시절을 회상하며, 나는 이렇게 호젓하게 늙어갈 것이다. 젊은이들의 낭만을 더욱 이해하고 즐거워하며, 죽어가는 지인의 침묵을 덤덤하게 바라보며, 가까이서 함께 공존하는 자를 더욱 사랑할 것이다. 엊그제 일은 깜빡깜빡 하면서도 50년 전 유년시절의 애틋함은 또렷이 남아 그리움이 되었으니..... 나도 어느덧 노인삼반(老人三反)에 들어가려 이런 글도 쓰게 되었으니.....근시안이 원시안 되어감을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가 있으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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