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만행 고발한 역사의 산증인 90대 회남면 터줏대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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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만행 고발한 역사의 산증인 90대 회남면 터줏대감
  • 천성남 기자
  • 승인 2014.02.20 07: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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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양래(회남면 분저리)옹
“요즘 일본정치인들의 망동이 좀 지나쳐요? 광복절에 신사참배를 강행하질 않나, 독도가 자기네들 땅이라고 우기지를 않나, 위안부 문제에 대해 사과는커녕 당연히 할 일 한 것처럼 군국주의 근성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마냥 합리화 하는 꼴이란 눈꼴시어 못 봐 주겠어유. 당시 마을에서 위안부로 끌려가는 아낙들을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거든. 이러다 다시 광기어린 무슨 짓거리라도 일으킬 것만 같아. 한국 사람들 정말 조심해야 해. 난 어차피 죽을 사람이지만 눈 감기 전 꼭 이 말을 하고 싶었어. 그래서 군에다 전화를 걸어 보은신문사와 연락이 된 거야.”
울분어린 목소리로 쓰지 못하는 한 팔을 마치 지팡이처럼 허공을 가르듯 분기충천한 박양래(91·회남면 분저리 189)옹은 이렇게 경거망동한 일본의 만행에 대해 직격탄을 날렸다.

21세 때 만주로 징병 해방 후 29일 걸어 고향 당도
“난 배움도 짧아, 겨우 초등학교만 나왔지. 그러나 평양에서 2년간 치 기공사 기술을 배우기도 했지. 십 수 년 전, 저 세상으로 떠난 아내가 13살, 내가 13살일 때 결혼을 했어. 아내가 나보다 생일이 빠르니 연상이지, 아내가 젊디젊은 만 21세가 되던 해 난 만주관동군으로 징병되었지. 일본군 3연대 3대대 8중대라고 똑똑히 기억해. 어쩌면 그 날의 억울했던 기억들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지도 몰라.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면서도 감동적 순간이었던 그날, 1945년 8.15 광복을 기억하지, 그때 난 만주에서부터 고향까지 무려 29일간을 터벅터벅 걸어 죽지 않고 돌아온 게야.”

한 집에서 91년째 살아와 당시 ‘일본조심’ 노래 대유행
“내가 살고 있는 이집은 당시 부자이셨던 부모님이 직접 지은 집으로 물려받아 살아온 지 벌써 91년째가 되네. 할아버지 4형제 중 벼슬한 분이 있는데 충청도 원을 지내셨어. 그 후 그나마 지키고 있던 전답이고 땅이고 뭐고 할아버지 형제 분 한 분이 다 쓰다 돌아가셨어. 이젠 남은 것이라곤 별로 없게 됐지. 당시 난 일명 양달학교를 다녔어. 양달학교라고 하면 학교 가다 놀다가 돌아오는 그런 학교를 말하는 게지. 좋았던 시절이었지. 당시 아이들이 즐겨 부르던 노래로는 ‘미국 놈 믿지 말고 소련 놈 속지 말고 일본 놈 일어난다. 조선 사람들 조심해라.’ 이런 노래가사가 대 유행이었어, 다 알다시피 그 의미는 일본을 매우 조심하라는 것이야.”

양재기 공기서 솥단지까지 싹쓸이해간 일제 만행 치떨려
“지금 생각하면 일본의 만행은 하늘을 찌를 기세였지. 집에 있는 솥단지고 자전거고 집게 고 쇠로 만든 모든 것은 다 뺏어 갔어. 당시 일부 조선사람(면서기, 주재소 순사)들이 일제에 아부하느라 이것저것 찔러 바치고 집집마다 양은솥, 공기 하나 남김없이 싹쓸이 해 갈 때였지. 기억해보면 당시 김OO이라는 한 악발이가 동네사람을 다 괴롭히고 다녔어. 아들들을 시켜 밤나무로 만든 울타리를 칼로 부시고 댕겼지. 치가 떨려. 지금 생각하면 과거는 과거대로 흘러갔지만 일본의 만행을 사람들이 기억하고 되새겨야 하는 교훈인거야.”

처조카도 당시 징병으로 끌려갔다 해방 후 죽어서 귀국
“그러고 보니까 우리 처조카도 징병으로 끌려갔다 해방 후 돼서야 죽어서 돌아 왔어. 지금도 일본치하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마음이 힘들어. 한 번도 잃어버린 적도 없고 잊혀 지지도 않아. 내선일체라고 들어봤어? 조선말도 쓰지 못하게 하고 일본말로만 쓰게 해 생각까지도 조선 사람이 아니고 일본사람처럼 살게 하려고 했던 무서운 놈들이었어. 농사 진 것도 지들 마음대로 당시이장과 단합해 반값도 안 되는 가격으로 공출해 가는 것은 물론 회인, 회남면 지역에 당시 금융조합(현 회인농협)을 만들어 백성의 고혈을 짜내갔어. 평민들은 이 금융조합을 통해 땅 몇 백 평씩은 거저 뺏기는 것이 다반사였어. 너무나 억울하게 당해 정신 바짝 차려야 산다고 생각했어. 아마 회남면에서는 지금까지 살아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 거야. 7형제 중 다 돌아가시고 셋째동생은 당시 265부대 김석원 사단장이었을 때 빨치산 토벌하러 갔다가 이북이 진격하는 바람에 죽었지. 그 연고로 6.25참전 유공자가 되어 우리 집 앞에 국가유공자의 집이란 팻말이 버젓이 붙어있는 거지.”

마을이장 25년 지도자 15년 대통령 감사장 등 표창장 17개
“난 그동안 마을이장만 25년 지냈고 농촌지도소에서 또 자원지도자로 15년 간 일했어요. 이승만 초대대통령 때 선거관리위원을 지내고 감사장을 받은 적도 있어요. 이명박 대통령 시절에 받은 감사장 등 합치면 표창장만 17개지요. 콩이나 땅콩 농사를 잘 지었다고 군수상을 받은 적 있어요. 제 자랑 같지만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오면서 가슴에 쌓인 한이 너무 많아...지원병으로 나가 해방됐어도 행방불명돼 살아 돌아오지 못한 셋째누이 남편도 있어. 안 잡아간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일본에 피해를 입었는데 잘못한 것이 없다는 것인지. 이 동네만 봐도 60안쪽에 다 죽고 살아있는 사람은 오직 나밖에 없어요. 내 소원은 우리후손들이 힘을 키워 일본에 대한 원수를 꼭 갚아달라는 말밖엔 할 말이 없어요. 징병이다, 공출이다 해서 온갖 악행을 다 저지르고 볶아치면서 언제 그랬느냐 발뺌하고 있는 꼴이란 말도 안 나와유. 너무 억울해서 가만히 있을 수 없지요.”

아내 병구완 20년 회남면 효부상 수상 상금 30만원 주민대접
“거동 힘든 나를 돌봐주러 오는 요양사는 바로 새누리 센터에서 나와유. 관절염으로 한쪽 팔을 잘 못 쓰고 잘 걷지도 못하는데 아직 장애인등급을 받을 상황은 아니라고 하니 아직 시설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이렇게 누워만 있어. 시설로 가면 40만 원 정도가 있어야 한다네. 내가 국가로부터 받는 돈은 노령수당 9만7천원, 국가유공자에게 나오는 유공수당 17만 원, 장애수당 3만 원등 모두 30여만 원으로 생활하고 있어요. 다리, 팔, 어깨 등 안 아픈 곳이 없을 만큼 아프지만 아직도 홀로 생활하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정말 힘들어요. 아내가 먼저 병석에 누워 내가 20년 간 병구완을 해왔어요. 회남면에서 주는 문화상인 효부상을 타고 받았던 상금 30만원으로 마을주민들에게 거나한 점심을 내기도 했었어.”

수난의 역사 재발 막기 위해선 투철한 역사의식 가져야
생각하면 아득했던 과거 일제침략 수난의 역사, 지금은 물질만능으로 쉽게 잊혀 져 가는 민족상흔이 됐지만 박 옹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그 날의 아픔을 잊지 못해 늘 가슴앓이를 는 중이다.
과거라 해도 70여 년 전이다. 이 땅에서 나고 자란 수백만 조선인들이 박 할아버지와 비슷한 과정을 거쳐 제 터전에서 뿌리 뽑힌 채 강제노역이나 징병에 내몰렸다.
치명적 부상과 후유증으로 불구가 되거나 생명까지 잃은 희생자들도 부지기수다. 나라를 잃고 식민지 백성으로 전락한 것도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 아픔이었는데, 거기에 그치지 않고 일제의 전시노무자로서 마구잡이로 국외에 동원된 것이 또 박 옹을 가슴 아프게 한 상처다. 우리나라와 일본 간의 과거사 문제는 결코 쉽게 풀리지 않을 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영원히 풀리지 않을 수도 있다.
박 옹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나의 생애이지만 그 전에 이 말을 꼭 하고 싶었다.”며 “후손들이 정신 차려 이 나라를 지켜야 일본으로부터 침략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며 격앙된 목소리로 혀끝을 끌끌 찼다.
/천성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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