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건천(恒乾川)
상태바
항건천(恒乾川)
  • 정점영(보은 종곡) 한국문인협회회원
  • 승인 2014.01.23 08: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국문인협회회원
나는 유년시절을 항건천과 함께 보냈다.

나의 유년시절 동정초등학교를 항건이 학교, 혹은 메지랑이 학교라고 불렀다.

40년대에 시발을 알린 오정리의 학교는 산척리와 율산리 학생에게 너무 멀어서 중심지인 메지랑이로 이사를 했다. 내가 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에 벌써 이루어진 일이다.
1학년때는 교실 없어 운동장에서 한글을 배웠고, 그 뒤 3학년까지는 동편 가건물바닥에 가마니멍석을 깔고 수학을 배웠다.
4학년이 되어서야 책상이 있는 본관으로 옮겼다. 고무신이나 방고무신을 신고 저고리 치마를 입거나 스웨터와 바지 위로 검은색 잠바스커트를 걸치기도 했다.
내가 담임선생님을 모시고 학교 앞 화단에서 친구들과 난생 처음 사진을 찍은 것도 그 무렵이다.

학교 운동장 앞으로 큰 도로가 나있고 그 길옆으로 집 몇 채가 있어 문구 등을 파는 가게를 내고 있었다. 길을 따라 나란히 한 채씩 붙어있는 집 뒤로는 5~10여m 급경사가 져있고 그 밑으로 바로 항건천이 넓게 흐른다.

항건천은 질신, 장선에서 오정리의 산자락을 휘돌아 내려오는 물과 노성산에서 발원한 물이 원동정과 차정리를 지나 율산의 물을 보태 메지랑이에서 합수되어 큰 내를 형성한다. 이 봇물로 물레방아를 돌리고 그 옆 합수들에 봇물을 대어 썼다.
율산을 지나 보은쪽으로 오다보면 교암의 항건이 솔밭에 이른다. 솔밭을 빠져나와 다시 냇가가 시작되고 그 내를 건너며 이제 나는 항건산을 떠나 수한면사무소가 있는 원너머에 다다른다. 면소를 지나자 마자 병원리 야산 밑 정자말 앞으로 건너가는 항건천의 돌다리들. 항건천변의 넓은 뜰은 섬 같았다.
좁다란 강변길은 돌맹이 천지이고 여기를 좀 걸으면 이번에는 아주 긴 내가 나를 기다린다. 거먹골과 가리침바위의 물이 더 합쳐진 냇가를 지나야 한다. 그러나 큰 돌이 넓게 꽉 박혀 있어 웬만한 비에는 발이 빠질 염려가 없는 곳이다. 이제 여기만 지나면 항건천을 직접 건너지 않아도 된다.
지금부터 항건천은 나를 뒷들의 신작로 흙바닥에 홀로 두고 저 혼자 먼길을 돈다. 항건천은 가련(嘉蓮)이를 거쳐 빈정(瀕汀)모팅이를 돌아 왜수를 지나면 곧 장신2리 비룡소(飛龍沼)에 이르러 박기종가옥(朴起鍾家屋) 옆을 흐르게 된다.

후평 가로수길에서 장신 신촌마을로 들어서게 되면서 나는 다시 항건천과 해후(邂逅)한다.
이제 내가 항건과 만나는 마지막이다. 항건천은 후평뜰과 장신의 저산(猪山) 끝머리를 연결하는 장신교를 지나 곧장 거현천과 만나고 장신끝머리에서 중초천(불로천)과 합류하여 남다리와 보은교를 지나면 금강의 제1지류 보청천(報靑川)으로 유입해 많은 벗들과 어울리며 연장 15㎞의 그의 임무가 끝이 난다.
어린시절 어느 여름 나의 로망이었던 자귀나무는 지금도 그대로일까?
내 정서가 그대로 녹아있고, 내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항건!
이제 항건이학교에는 응원가 노래 소리 사라지고, 나의 학적 모두는 말꼬지학교에 가 있으나 내 기억, 나의 유년, 나의 추억, 나의 노래, 나의 낭만, 나의 꿈이 시방(時方)도 그대로 거기에 살아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