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의 길위에 점점이 뿌려진 김정의 선비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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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길위에 점점이 뿌려진 김정의 선비정신”
  • 박진수 기자
  • 승인 2013.07.18 08: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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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싣는 순서
1. 이상세계의 학문적 소양과 꿈을 키워준 보은 땅
2. 도덕적 학문을 현실로 이끈 실천운동가 김정
3. 향약과 미신타파로 사회 개혁운동의 선구자
4. 충암 김정이 남긴 역사의 흔적을 찾아서
5. 고향을 빛낸 충암 김정선생 선양을 위한 노력

고향을 빛낸 역사인물 충암 김정은 조선시대 현실정치 타개를 위한 이상정치의 선구자로 조선전기 조광조와 기묘사화를 일으켜 새로운 개혁정치에 앞장 섰던 인물이다. 충암 김정의 생애와 업적을 중심으로 그가 남긴 학문을 비롯 역사적 흔적을 조명하고 보은지역의 역사.문화적 자긍심과 정신문화의 계승,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제주 땅에 ‘선비정신’을 심어준 김정
제주도 기념물 제1호인 오현단의 유래는 선조 11년(1578) 판관 조인후가 유배중 제주도민교화와 미신타파, 흥학교육을 위해 헌신한 충암 김정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그의 적소(유배되어 있던곳)였던 가락천 동쪽에 충암 묘(사)를 짓고 제사를 지낸데서 비롯됐다.
오현단은 제주의 정신적인 지주로 숭상되어 온 곳으로 중종 15년(1520)에 유배왔다가 사사된 충암 김정(1486∼1521), 중종 29년(1534)에 제주목사로 부임했던 규암 송인수(1487∼1547), 선조 34년(1601)에 안무어사로 내려왔던 청음 김상헌(1570∼1652), 광해군 6년(1614)에 유배된 동계 정온(1569∼1641), 숙종 15년(1689)에 유배왔던 우암 송시열(1607∼1689) 등이다.
다섯 분의 선생은 깊은 학식과 고매한 인품을 지녀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다. 제주에 머무르는 동안 유생들의 교육에 힘썼으며 선비정신을 일깨워 주어 뒤쳐졌던 제주에 새로운 문화운동을 일으킴으로써 훗날 제주사람들은 오현으로 추앙하였다.
지금도 단내에는 유적으로 오현의 위패를 상징하는 조두석이 배열되어 있다. 또한 철종 7년(1856)에 채동건 목사 때 판관 홍경섭이 오현단 서쪽 벼랑, 속칭 ‘병풍바위’에 송자(宋子)로 추앙을 받던 송시열의 필적으로 ‘증주벽립(曾朱壁立)’의 네 글자를 음각하여 새겼다. 이 글은 “증자와 주자가 벽에 서 있는 것처럼 존경하고 따르라”는 뜻이다. 그리고 김정과 송시열의 적려유허비 등이 있다. 김정의 제주풍토록, 김상헌의 남사록 등의 문헌을 남기고 있다. 오현의 숭고한 교육애를 계승하는 뜻에서 우공 황순하 선생은 오현단 경내에 오현중학교(1946), 오현고등학교(1951)를 설립하여 제주교육의 선도적 역할을 하고 있다.
오현의 가르침은 교육의 불모지였던 제주 땅에 학문을 일으켜 제주사람들의 가슴 속에 참과 슬기와 꿈을 펼치게 함으로써 제주교육사에 신기원을 이룩했다.
제주 한학자 오문복 선생은 “김정 선생은 유배라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고 백성을 위한 위민정신이 투철한 분이었다” 며 “옛 가락천에 우물을 파고 인근 백성들에게 사용한 유래가 지금은 ‘판서정’으로 전해지고 있다” 고 말해 김정 선생의 선비정신이 꺽이지 않았음을 증명하고 있다.


▲ 제주 오현단에서 충암 김정 선생의 업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오문복 한학자(좌측)와 유재관 문화관광해설사(우측)의 모습.
김정의 흔적 전국 곳곳에 산재
최초의 소수서원에 이어 두 번째로 1610년에 사액된 서원으로 1977년 12월 6일 충청북도기념물 제43호로 지정된 상현서원은 본래 지방유림에서 기묘명현 충암 김정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향하면서부터 시작됐다.
그 후 참봉 안황이 서원 건립을 추진하던 중에 성제원 현감이 부임해 1555년(명종10년) 삼년산성 안에 충암(沖庵) 김정(金淨)을 향사하는 독향원(獨享院)을 세우고 ‘삼년성서원’ 이라 하였는데, 1610년(광해군 2)에 ‘상현’이란 이름의 사액(賜額: 임금이 서원의 이름을 지어줌)을 받았다.
1672년(현종 13) 삼년성 안에서 장안면 서원리로 옮겨 세웠으며, 대곡 성운(成運)을 을사명현으로 배향하고 보은현감을 지낸 동주 성제원과 중봉(重峯) 조헌(趙憲)을 1681년(숙종 7)에,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을 1695년(숙종 21)에 추가 배향하여 5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현재는 보은군 장안면 서원리에 위치해 해마다 음력 2월과 8월 중정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또 충암 김정이 고봉(孤峰)이라 칭하고 학문을 연마하던 곳으로 삼파연류봉(三派連溜峯) 정상에 김정, 최수성(崔壽城:1487∼1521)이 고봉정(孤峰亭)을 세우고 은거하였다. 후에 병암(屛菴) 구수복(具壽福:1491∼1545)이 이어받았으며 이들이 죽은 후 구수복의 5대손인 구이천(具爾天)이 퇴락해 있던 정자를 봉 아래로 옮겨 현재의 고봉정사를 지었다. 현재 보은군 마로면 관기리에 위치해 있다.
현재 충암 김정 선생의 묘소는 대전광역시 동구 신하동 소재 문화재자료 25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여기에는 신도비, 별묘, 산해당, 부인의 정려각등이 조성되어 있다.
이밖에도 청주에 위치한 신항서원, 대전 계족산 인근 숭현서원, 금산의 성곡서원, 복원을 기다리는 보은의 옛 석천암, 보은읍 성족리 유허비 인근 생가터 등 충암의 흔적은 전국 곳곳에 점점이 뿌려져 있다.


▲ 국립청주박물관 수장고에서 기탁도서를 소개하고 있는 성재현 학예사.
김정의 역사적 흔적 언제쯤 햇빛 볼까
국립청주박물관은 대전에 있는 충암 김정 선생 종가로부터 초간본 ‘충암집’ 등 143건 695점의 고서와 고문서를 기탁 받아 자료 정리를 완료하고 특별 공개된 바 있다.
대전 소재 충암 김전 선생의 종가는 대대로 내려온 많은 고서와 고문서를 보관해오다 국립청주박물관의 문중 학술 조사 사업에 문화재를 모두 기탁했다.
이를 통해 공개된 문화재는 사서삼경과 같은 경전류, 강목 등의 역사서, 가례와 같은 예서가 비교적 완벽한 상태로 보존되고 있다.
특히 종가의 기호학파(畿湖-學派) 학문 경향을 보여주는 ‘우암집’, ‘농암집’, ‘송사사절’과 조광조의 문집 ‘정암집’ 등 조선시대 문신이나 학자의 장서인이 찍힌 고서와 고문서 695점이 공개된 바 있다.
국립청주박물관 성재현 학예사는 “지역의 문중으로부터 소중한 문화재를 기증·기탁 받아 안전한 보존으로 전시와 학술 연구에 적극 활용할 계획”이라며 “충암 김정 선생이 남김 소중한 문화유산을 통해 지역 정신문화의 토대를 마련하는데 노력하겠다” 고 밝혔다.
충암 김정이 남김 대표적인 그의 문집인 「충암집」 이 있다. 특히 제주 대정에서의 유배생활에서 체험한 그곳의 풍토와 상황을 사실적으로 기록한 글로 충암집 권4에 수록되어 있는 “제주풍토록” 이다. 김정 선생이 1년여 기간동안 언제 사약이 내릴지 모르는 극한 상황 속에서도 삶에 대한 의욕을 잃지 않고 생생한 체험 기록을 담고 있으며, 학자로서의 풍모를 유감없이 발휘한 것이어서 더욱 값진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전국에 흩어져 산재한 충암 김정 선생과 관련된 유물, 유적등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공간이 그의 고향 보은읍 성족리에 우뚝서길 기대해 본다.
기획취재팀/박진수 기자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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