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분과 원칙을 위한 실천은 사회자본으로 승화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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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분과 원칙을 위한 실천은 사회자본으로 승화돼야”
  • 박진수 기자
  • 승인 2013.07.11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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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고향을 빛낸 충암 김정 선생을 조명한다

글싣는 순서
1. 이상세계의 학문적 소양과 꿈을 키워준 보은 땅
2. 도덕적 학문을 현실로 이끈 실천운동가 김정
3. 향약과 미신타파로 사회 개혁운동의 선구자
4. 충암 김정이 남긴 역사의 흔적을 찾아서
5. 고향을 빛낸 충암 김정선생 선양을 위한 노력

고향을 빛낸 역사인물 충암 김정은 조선시대 현실정치 타개를 위한 이상정치의 선구자로 조선전기 조광조와 기묘사화를 일으켜 새로운 개혁정치에 앞장 섰던 인물이다. 충암 김정의 생애와 업적을 중심으로 그가 남긴 학문을 비롯 역사적 흔적을 조명하고 보은지역의 역사.문화적 자긍심과 정신문화의 계승,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 20대의 김정 선생이 최수성, 구수복 선생과 함께 학문을 닦고 연마하던 보은군 마로면 소재 고봉정사.
김정의 개혁의지는 기묘사화
김정이 살았던 시대는 연산군의 폭정과 반정으로 얼룩졌던 격랑의 시대였다. 이러한 격동기속에서 조광조와 함께 개혁을 추진하다 저항에 부딪쳐 무참한 희생을 당하는 기묘사화를 겪었다.
격동기를 살았던 김정의 현실인식과 현실개혁의 논리는 김정이 홍문관 부제학으로 올린 글에서 “지금 나라는 폐조(廢朝)를 거친 관계로 선비들은 진실한 마음을 잃었으며, 세상에는 좋은 풍속이 없어져서 사람의 양심은 찾아 볼 수 없고 규율은 해이될 대로 해이 해졌으며 국경에는 걱정이 많고 백성은 빈궁에 허덕이는 것이 오늘날 극도에 달해 곧 죽게 된 병자와 같다” 고 하였다.
김정은 당시의 현실을 서둘러 개혁하지 않으면 안 될 격정기로 인식하고 이에 대한 적절한 대응을 강조하며 개혁에 있어 때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임금의 의지와 결단을 촉구했다.
▲ 고봉사
또한 조광조에 의해 인사개혁으로 추진된 현량과(賢良科)를 적극 지지하면서 김정은 사장(詞章) 중심의 과거제도의 폐단을 비판하고 덕행과 재능을 중시하는 인사원칙을 제시하고 있으며, 특히 유능한 인재의 추천과 함께 대체시험을 통한 선발 즉 현량과의 실시를 주장했다. 물론 이것은 기묘사화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지만 획기적인 인사개혁의 한 방법으로 제시된 것이다.
기묘사화는 1519(중종 14)년 11월에 일어난 사화로 남곤, 심정 등의 훈구파가 성리학에 바탕을 둔 이상 정치를 주장하던 조광조(趙光祖), 김정(金淨) 등의 신진파를 죽이거나 귀양 보낸 사건이다.
중종은 유교정치를 진흥시키고자 사림을 다시 등용하는데 그 중 중종이 조광조를 기용하면서 사림들은 중앙으로 대거 진출하고 급진적 개혁을 주장한다. 그 중 중종 반정 때 공신에 오른 위훈을 삭제하자는 주장이 일자 훈신들이 반격을 한다. 중종의 밀지를 받은 홍경주, 남곤, 심정(훗날 '기묘삼간'으로 불린다) 등이 조광조, 김정, 김식, 김구, 윤자임 등을 체포, 구금하면서 일어났다. 결국 조광조는 사사되고 신진 사림은 화를 당하여 사림 세력은 크게 위축되고 이들이 추진했던 개혁들도 대부분 혁파된다.

 

 

▲ 기묘록보유(조선 후기)
향약으로 사회교화, 미신타파 주장
김정은 사회교화의 방법으로 향약의 실시를 적극 주장한다. 김정은 지방에서 여씨향약 (呂氏鄕約)을 보고 백성을 교화에 큰 관계가 있다고 주장하며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는 향약의 공효를 설명하고 보다 적극적인 향약의 시행을 임금에게 촉구했다.
또 조광조의 의견에 따라 소격서(昭格署)의 혁파를 주장한다. 연산군과 중종 2대에 걸쳐 소격서의 혁파문제를 둘러싸고 왕실과 유신들 사이에 대립이 있었다. 연산군 때에는 소격서가 일단 형식적으로나마 혁파되었으나 위판도 보존되고 초제도 여전히 집행된다.
중종이 왕위에 오른 이후 소격서 혁파는 끈질기게 논란
▲ 기묘팔현전(조선 후기)
이 계속됐다. 조광조를 선두로 김정선생은 강경하게 소 격서의 혁파를 중종에게 요청했다. 그러나 중종은 조종(祖宗:임금의 조상) 이래로 지켜 내려온 제도이므로 경솔하게 없앨 수 없다 하여 거부했다. 이에 조광조와 김정선생은 도교는 세상을 속이는 좌도(左道), 즉 이단이므로 소격서는 혁파되어야 하고, 또한 하늘에 대한 제사는 천자만이 할 수 있는데 일개 제후인 조선왕이 하는 것은 예에 어긋나므로 소격서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광조와 김정선생은 “소격서에서 기도를 드리는 것 같은 일들은 만분의 하나 혹시 그런 이치가 있더라도 정말 지극히 공정하고 사심이 없다면 어떤 경우에도 이것을 두어서는 안된다. 더구나 이런 이치가 절대로 없는데서야 더 할 말이 있습니까? 선왕의 나쁜 풍습을 그대로 따르거나 또 뒷날에 까지 물려주어서는 안된다. 이때야 말로 없애 버려야 할 기회이니 망설이지 말기 바란다” 고 주장했다.
이와 같이 그는 조광조와 함께 국초부터 관서를 설치하고 천지성신에게 제사를 거행하던 소격서의 혁파에 앞장서서 왕대비와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이를 관철시켰던 것이다.
조광조 등의 청원은 밤을 지새우며 중종에게 간청하여 청원을 넘어선 핍박에 이르니 중종은 1518년(중종 13)에 마지못해 소격서의 혁파를 허락하였다. 그러나 폐지한 지 몇 해 되지 않은 1525년(중종 20) 모후(母后)의 병환이 위중하게 되자 회복을 기도한다는 이유로 다시 소격서를 설치하라고 명하게 되었다. 사간원에서 상소를 올리는 등 유신들의 들끓는 반발이 있었으나 듣지 않았다. 그렇지만 소격서는 유교로 사상을 통제하던 조선에서 명맥을 유지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을 겪는 중에 제사가 폐지되었는데 그 후 다시 설치되지 않고 완전하게 폐지된다.
김정은 조광조의 정치적 성장을 뒤에서 도왔고 그와 함께 사림파의 대표적인 존재로서 신진 사림들의 세력 기반을 굳히기 위해 현량과(賢良科)의 설치를 적극 주장하기도 하였다. 또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개혁 정치를 폈는데 그 일환으로 미신 타파와 향약을 실시해 정국공신의 위훈삭제(僞勳削除) 등을 추진하게 됐다.
김정은 관료 생활을 하면서도 성리학에 대한 학문 정진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시문에도 능했다. 또한 새· 짐승 등의 그림도 곧잘 그리는 정말로 젊고 재능이 출중했다. 그러나 세상은 이처럼 잘난 이를 가만 두지 않는다. 김정은 1519년 기묘사화에 연루되었다. 조광조가 주도하였던 개혁정치의 핵심세력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서른 넷 김정의 젊은 기개가 엿보인다.
대전대 국어국문학과 민찬 교수는 “관료였던 김정 선생이 뛰어난 문인으로 칭송할 수 있는 작품이 많이 남아 있다는 점과 그의 고향에 대한 애정과 공동체 의식, 명분과 원칙, 미풍양속등은 지금으로 말하면 훌룡한 ‘사회적 자본’ 이 되기에 충분하다” 며 “그가 남겨 놓은 600여편의 작품들은 한편한편이 주옥같은 것들이어 앞으로 지속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고 말하고 있다.
기획취재팀/박진수 기자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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