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不義)를 도덕으로 맞서 대동사회 구현에 앞장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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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不義)를 도덕으로 맞서 대동사회 구현에 앞장서다 ”
  • 박진수 기자
  • 승인 2013.07.04 07: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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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싣는 순서
1. 이상세계의 학문적 소양과 꿈을 키워준 보은 땅
2. 도덕적 학문을 현실로 이끈 실천운동가 김정
3. 향약과 미신타파로 사회 개혁운동의 선구자
4. 충암 김정이 남긴 역사의 흔적을 찾아서
5. 고향을 빛낸 충암 김정선생 선양을 위한 노력

고향을 빛낸 역사인물 충암 김정은 조선시대 현실정치 타개를 위한 이상정치의 선구자로 조선전기 조광조와 기묘사화를 일으켜 새로운 개혁정치에 앞장 섰던 인물이다. 충암 김정의 생애와 업적을 중심으로 그가 남긴 학문을 비롯 역사적 흔적을 조명하고 보은지역의 역사.문화적 자긍심과 정신문화의 계승,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 충암 김정 선생이 순창군수 재직시 폐비신씨의 복위를 주청한 상소 내용이 적혀있는 삼인대비. (전북 순창군 팔덕면 청계리 소재)
윤리적 실천 강조한 도학실천가 김정
충암 김정은 정암 조광조와 함께 지치(至治)개혁에 앞장서다 희생된 기묘명현의 한 사람이다. 지치(至治)의 꿈을 펴 보지도 못하고 36살의 젊은 나이로 생애를 마쳤다. 그는 유교적 학문도 깊었고 조광조와 뜻을 같이 한 동지로서 당시 위상도 높았다. 대사헌을 역임 할 만큼 총망도 컸지만 스스로 사양하고 겸양하는 미덕을 갖고 있었다.
충암 김정선생의 지치란 인간에 의해 다스려지는 이 세상이 바로 하늘의 뜻이 펼쳐진 이상세계가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대동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 각자가 덕성과 인성을 수양하여 성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는 개인이 모여서 이루어졌음으로 하늘과 하나인 개개인이 수양하여 도덕을 실천하는 사회를 만드는 즉 지치의 대동 사회 건설을 목표로 하는 정치적 실천운동이었다.
김정선생의 성리학적 이상세계를 지향한 지치의 도학정신은 조선의 통치철학으로 퇴계와 율곡에게 영향을 주었고 사림의 정신적인 표상이 되어 한국 유학의 기본적 성격을 형성시키는 토대가 되었다. 이러한 사상은 특정정파의 정치적 목표에 국한되지 않고 조선시대의 정치와 경제는 물론 문화에 이르는 총체적 시대정신이자 통치철학이었다.
대동 사회를 건설하려는 선생의 지치주의는 조선 오백년을 면면히 이어져 오늘날 통치철학의 빈곤으로 지역 간, 세대 간 갈등으로 소통구조가 시급한 오늘의 한국 정치상황을 극복하는 하나의 지침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김정은 30살의 젊은 나이로 박상과 함께 폐비된 중전 신씨의 복위를 청하는 상소를 올려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그것은 이들이 중앙의 저명한 인물이 아닌 지방의 보잘 것 없는 미천한 신분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아직 언로가 제대로 열리지도 않았고, 반정공신들의 입김이 아직도 여전한 상황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상소를 올렸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다. 이는 김정이 실천적 지성인의 본보기였음을 말해주는 것이고, 도학자로서의 모범을 보여준 것이라 평가된다.
김정의 도학(道學)이란 유학과 구분되는 것은 윤리적 실천을 강조하는 의미가 크다. 윤리규범의 실천도 중요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생사의 기로에서 선악을 구별하고 정의와 불의를 선택하는 용기가 중요한 것이다.
김정은 조광조와 함께 현량과의 설치를 주장하는가 하면 향약의 간행을 주청하였고, 소격서의 기능을 강화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또 작은 소읍(小邑)의 합병을 통해 행정의 효율성을 제고하고 감사의 임기를 보장하여 행정의 내실을 기해야 한다 하였다.
충남대 철학과 황의동 교수는 “비록 그의 온전한 문집이 전해지지 않아 그의 철학 전모를 알 수 없는 아쉬움이 있으나 전해진 자료를 통해서만 보더라도 그의 학문적 폭과 깊이를 이해할 수 있다” 며 “체계적인 학설도 중요하고 깜짝 놀랄 경세대안도 중요하지만 지치(至治)의 꿈을 실현하고자 용기있게 살다 간 충암 김정의 도학정신이야 말로 이 시대가 본받아야 할 교훈이라 생각된다” 고 말하고 있다.

 


▲충암집(사진제공 청주박물관)
불의에 맞선 정의로운 투사 김정
충암 김정을 이야기 할 때 빼 놓을 수 없는 사건이 전북 순창군 팔덕면 청계리 산 271번지 소재 강천산내에 있는 삼인대(三人臺)에 대한 것이다. 1515년(중종 10년)에 신비복위 상소를 올리기 위하여 당시의 순창군수 충암 김정(1486-1521)과 담양부사 눌제 박상(1474-1530)과 무안현감 석헌 류옥(1485-1519)의 3인이 소나무에 관인을 걸고 맹세하여 그것을 의논했던 유서 깊은 곳이다.
충암 김정, 눌제 박상, 석현 류옥 3인은 서로 뜻이 같아서 순창의 강천산에서 만나 관인을 나무에 걸고 서로 맹세를 하고서 신비 복위상소를 올리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것은 당시 사림파들의 공통적인 의견이었다. 진즉 신비 복위를 꾀하고 싶었으나 장경왕후가 왕비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던 터였다. 이제 왕비가 승하하였으니 이 기회가 가장 좋은 기회였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사림의 뜻이고 백성들의 바람이라 할지라도 조정에서 실권을 쥐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반정공신들이었기에 그들이 반대할 것은 기정 사실이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중죄로 다스릴지도 모를 일이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합의를 보고 상소를 올린다는 것은 목숨을 건 중대한 일이었다.
이 상소의 대강의 요지를 살펴보면 제왕이 천명을 받아 나라를 세우는 도는 시초를 바로 잡은 것을 근본으로 삼았다. 이 근본이 정당하면 질서가 바르게 서서 광명함이 위로부터 작용하여 만사가 순조롭게 이루어진다는 내용으로 신비복위의 정당성을 역설하였다.
이 상소가 올려지자 당시 대사간으로 있던 이행을 비롯한 훈구파들에 의하여 묵살되었을 뿐 아니라 이 상소를 올린 김정과 박상을 중죄로 다스려야 한다는 주장이 강하게 일었다. 이에 대해 좌의정 이었던 정광필과 사간원 정언(正言)으로 있던 조광조등이 언로(言路)를 막은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하였으나 결국은 김정은 보은으로 박상은 조림역으로 유배된다.
그리고는 이듬해에 풀려 나왔고 또한 조광조는 이행이 대사간으로서 언로를 막고 김정과 박상을 유배시킨 것을 강력하게 탄핵하여 마침내 이행을 파직시키고 말았다.
이 사건은 충암 김정등의 신진사류들이 이 나라에서 이상적인 도덕정치를 실현해 보려는 의도와 맥을 같이하는 사건이었다. 이 상소의 내용에 있는 바와 같이 동양철학 사상에 바탕을 둔 윤리관으로서 부부의 윤리 가정의 윤리가 먼저 정립되어야 사회의 질서가 유지되고 국가의 기강이 바로 세워진다고 하였다.
이러한 과오는 중종 자신이 저질렀으며 그 뒤에는 자신들의 호신만을 생각한 공신들의 협박이 있었다고 하였다. 이제 장경왕후가 승하 하였으니 이 기회에 신비를 복위시켜서 지난날의 과오를 바로 잡아야 나라의 기강도 바로 설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이 상소문은 논리가 정연하고 철학에 바탕을 둔 윤리를 주장한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권세를 쥐고 있는 공신들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신비가 복위 되었을 때에 자신들의 설 땅이 없어진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상소를 낸 충암 김정등은 그 실현을 믿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옳은 말을 해야 한다는 뜻에서 이 상소를 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오직 사심을 버린 우국충정에 의한 선비정신이다. 곧 옳은 말을 했다가 좋지 못할 것이 예견되면 그만 두고 뜻이 이루어진다는 승산이 있을 때에만 행동으로 옮긴 사람들과는 근본적으로 철학이 달랐다.
그 결과에서 설혹 죽음을 가져온다 할지라도 이것이 국가나 인류에게 옳은 일이라고 판단되면 서슴없이 그 뜻을 나타내는 것이 선비정신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에 위 3인은 우리 역사에서 불의를 바로 잡으려는 정의의 투사였으며 그 중심에는 충암 김정선생이 있었으며 불의를 도덕적인 윤리로 행동과 실천으로 맞선 사회개혁운동가였다.
/기획취재팀 박진수 기자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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