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로 태어난 김정, 속리산에서 이상정치를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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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로 태어난 김정, 속리산에서 이상정치를 꿈꾸다”
  • 박진수 기자
  • 승인 2013.06.27 07: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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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고향을 빛낸 충암 김정 선생을 조명한다

글싣는 순서
1. 이상세계의 학문적 소양과 꿈을 키워준 보은 땅
2. 도덕적 학문을 현실로 이끈 실천운동가 김정
3. 향약과 미신타파로 사회 개혁운동의 선구자
4. 충암 김정이 남긴 역사의 흔적을 찾아서
5. 고향을 빛낸 충암 김정선생 선양을 위한 노력

 


고향을 빛낸 역사인물 충암 김정은 조선시대 현실정치 타개를 위한 이상정치의 선구자로 조선전기 조광조와 기묘사화를 일으켜 새로운 개혁정치에 앞장 섰다. 충암 김정의 생애와 업적을 중심으로 한 그가 남긴 학문을 비롯 역사적 흔적을 되짚어 보고자 한다. 보은군의 대표적인 역사문화 인물인 충암 김정선생을 조명하고 충암 김정 선생을 통해 보은 지역의 역사문화적 자긍심과 정신문화의 계승,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보은읍 성족리에 위치한 충암 김정선생의 유허비.
성인의 족적을 남긴 속리산 아래 성족리
보은군 보은읍 북실마을은 12개의 자연마을로 김장유를 입향조로 하여 경주 김씨는 보은지역의 최대 성씨로 정착하게 되었다. 본래 김정의 자는 원충, 호는 충암.고봉으로 1486년(성종17년) 보은 성족리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처용(處庸)이고, 아버지는 호조정랑 효정(孝貞)이며, 어머니는 김해 허씨(金海許氏)로 판관(判官) 윤고(尹恭)의 딸이다. 충암 김정은 3세에 할머니 황씨에게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충암의 나이 여섯 살 때 한시를 지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모르기는 해도, 여섯 살 아이가 정말로 이러한 시를 지었다면 배워서 지은 결과는 아니라고 본다.
말 그대로 ‘생이지지(生而知之)’에 해당하는 인물로 천품의 자질을 안고 태어났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14살 때(1499년, 연산군5)에 이미 별시(別試) 초시(初試)에 장원이 되었고, 19세 때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22살 때(1507년, 중종2)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했고, 이듬해에 문신정시(文臣庭試)에서 다시 장원을 차지했다.
그는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에 보임되고, 수찬(修撰)·병조좌랑을 거쳐 정언(正言)으로 옮겨졌다. 이어 병조정랑·부교리(副校理)·헌납(獻納)·교리·이조정랑 등을 거쳐 1514년 29세의 젊은 나이에 순창군수가 되었다.
이 때 왕의 구언(求言 : 정치에 도움이 되는 말이나 글)에 응해 담양부사 박상(朴祥)과 함께 중종 때 억울하게 폐출된 왕후 신씨(愼氏)의 복위를 주장하고, 아울러 신씨 폐위의 주모자인 박원종(朴元宗) 등을 추죄(追罪)할 것을 상소했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고향인 보은에 유배되었다.
1515년 8월 충암은 폐비 신씨의 복위소를 올린 죄목으로 보은 함림역(含林驛)으로 유배를 떠나게 된다. 다음해 3월 방면이 되면서 충암의 유배는 8개월 남짓 밖에는 이어지지 않았다. 함림역은 고향 마을과 지척지간에 있는 곳으로 충암에게는 고향과 다름이 없었다. 중종으로서도 훈구세력들이 주청을 어찌하지 못하여 부득이하게 내린 처사였고 조정의 여론도 충암 편이었다. 이 같은 정황으로 보아 유배지에서의 생활이 처절의 극을 경험하는 그러한 정도는 아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당시 권민수(權敏手), 이행(李荇) 등은 이들을 엄중히 다스릴 것을 주장한 반면, 영의정 유순(柳洵) 등은 이에 반대했고, 조광조(趙光祖)도 치죄를 주장한 대간의 파직을 주청하였다. 1516년 석방되어 박상과 함께 다시 홍문관에 들고, 권민수와 이행은 파직으로 마무리되었다. 그것은 곧 중앙 정계에서 사림파의 승리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 뒤 응교(應敎)·전한(典翰)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뒤에 사예(司藝)·부제학·동부승지·좌승지·이조참판·도승지·대사헌 등을 거쳐 형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이러한 그의 정치적 성장은 괄목할 정도였는데, 그것은 당시 사림파의 급속한 성장과 긴밀한 관계를 지닌 것이었다.

경주 김씨 족보(사진 청주박물관 제공)
“속리산 찾아 세계성을 띤 대인의 기상 함양”
청주대 한문학과 김홍철 명예교수는 충암 김정에 대해 천재적 자질을 타고난 동방신동으로 일컫고 있다. 천재적인 총명을 타고 난 선생은 학업에 정진함이 유별나서 학문으로 대성하고 글씨를 공부할 때 가죽나뭇잎으로 따서 연습을 하였는데 그 잎사귀가 마루 아래 쌓은 것이 산과 같다고 하여 바람이 불어 그 잎사귀를 마을의 물이 불려 넣으니 검게 물이 변화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고 한다. 또 침식을 잊고 공부하거나 밤을 꼬박 새워서 공부하는 일이 많아 아버지 정언공이 건강을 해칠 것을 염려하여 하인들에게 밤에 쓸 기름을 더 많이 주지 못하도록 엄명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11세에 동네 아이들에게 작은 나라에 태어나 대장부의 하고 싶은 바 큰 뜻을 다 펼칠 수 없는 것이 한이라고 말하여 공자의 등동산지지를 피력하면서 속리산 수정봉과 문장대에 올라 안목을 공자의 동산지지와 같이하여 젊은 시절 인생의 비젼이 원대하였고 늘 대인의 기상을 함양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초학시절 백형과 속리산 복천암 도솔암에서 공부한 일이 있고 21세에는 보은 관기 구병산 아래 고봉정사에서 최수성, 구수복 등과 성학탐구에 심치하였다고 한다.
충암 김정선생을 연구한 학자들은 11세의 나이에 선생의 뜻 하는바 이상이 세계성을 띠는 안목을 소유하고 있었다고도 피력하고 있으며 선생의 이러한 포부는 30세에 재상이 되어 지치주의 실현을 도모하다 좌절할 수 밖에 없는 자신의 불행을 예감할 정도로 선견지명을 지니셨다고 한다.
충암 김정 선생의 타고난 효성은 15세 부친이 별세하자 장례를 주자가례 예법대로 철저히 지킴은 물론 몸을 상할 정도로 슬퍼하였고 3년 동안 겨우 죽으로만 연명하여 보는 이를 감동케 하였다. 그 뒤에 홀로계신 어머니를 섬김에 온갖 정성을 다 바쳤는데 특히 병환으로 입맛을 잃으면 큰 고개 너머에 있는 구룡소에 날마다 가서 낚시질을 하여 고기를 잡아다 대접하기를 병환이 다낫기까지 계속하였다 한다.
또 선생이 25세에 홍문관 교리로 있을 때 늘 고향에 계신 노모를 걱정하다가 끝내 노모 봉양을 위해 귀향을 간청하는 소를 올리니 임금께서 특별히 그 효성에 감동해 충청도 도사를 제수한 일이 있다고 한다.
그 뒤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금산에 유배되었을 때 어머님 병환을 못 견디게 슬퍼하다 금산원의 허락을 받아 100대의 악형을 당한 몸으로 고향의 어머님을 잠시라도 찾아 뵙고 돌아온 일은 보통사람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효성이었다. 유배지인 제주에서 지은 시문이나 고향에 보낸 서찰등에 가슴을 울리는 효심이 잘 드러나 있다.

“섬광 같은 김정의 삶이 이제 목마른 시대를 적셔준다”
충암 김정 선생의 생애는 너무나 짧았다. 하지만 섬광같은 그의 빛난 삶은 너무나 당당하고 치열한 도전이었다. 그가 남긴큰 자취는 두고두고 길이 후세들에게 가치 있는 삶의 생상행 교훈과 후학들의 연구대상이 되고 있다. 선생의 육신은 죽었으나 그의 학문과 문학은 영원히 살아 역사의 한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대전대 국문학과 민찬교수는 “충암은 이 시대의 사표가 넉넉하게 될 수 있는 분으로 당대 및 후대의 사람들로부터 한결 같은 칭송을 받은 분명하고도 확고한 자질을 지니고 있는 분” 이라며 “원칙에충실하며 일체의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현실을 개혁하기 위해 매진하다가 죽음에 임해서도 흔들리지 않았던 목마른 이 시대를 청량하게 적셔주는 문인이자 정치가였다” 고 말하고 있다.
/기획취재팀 박진수 기자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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