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말라야 에베레스트산 탐험기⑦
우재문 귀농귀촌협의회장
사람은 누구나 평생에 걸쳐 도전하고 싶은 꿈이 있다. 육순을 훨씬 넘긴 나이에 혹한과 싸우며 희말라야 에베레스트 산 정복에 인생의 도전장을 낸 사람은 바로 우재문(66·귀농귀촌협의회장)씨다. 그는 지난 5월 4일부터 6월 1일까지 근 한 달 일정으로 부인 우혜숙(61)씨와 함께 배낭을 메고 중국을 거쳐 악천후로 인해 방글라데시 다카공항에 불시착, 네팔 카투만두 공항을 거쳐 희말라야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5360m)까지 등정했다. 본란은 60대의 무한도전인 에베레스트 산 등정기 중 하이라이트만을 추려 8회에 걸쳐 게재한다. 〈편집자 주〉 우재문 귀농귀촌협의회장

고락셉은 에베레스트 등반을 하기 위한 마지막 숙소 겸 식당이 있는 곳이다. 마을은 없고 밤에는 춥다. 얼음이 언다. 아침은 생략하고 뜨거운 물에 수프를 한 잔 마시고 출발했다.
짐꾼 라즈가 간밤에 고산증이 와서 오늘은 같이 갈 수 없단다.
모든 짐을 놓아두고 가벼운 배낭만 메고 집사람과 둘이서 오전 6시에 출발했다. 히말라야 산닭 소리만 간간이 들릴 뿐이다. 크기는 한국의 야생산닭보다 훨씬 크고 사람이 다가가도 도망가지 않는다.
사방에 깔려있는 저 돌들, 수천만 년을 지나 저마다 그대로 박혀있는 돌들, 겨울엔 얼어붙고 여름에 녹고 수천만 년을 그렇게 해왔을 것이다.
저 거대한 흰 눈 덮인 봉우리, 인간의 모습이기도 하고 신의 모습 같기도 하다. 신이 존재하기에 알맞은 이곳, 히말라야는 신들의 고향이다.
모든 등반 객이 지그재그로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어간다. 산소가 희박해서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차오른다. 누구와도 경쟁할 필요도 없다. 느림의 철학이 이곳에서는 그저 정답이다.
풀 한포기 없는 광활한 대지위에 모래바람이 불어오면 눈을 질끈 감아야 한다.
한참을 걷다가 길모퉁이에 서서 오른쪽을 보니 저 아래에 노오란 텐트가 작은 점처럼 보인다. 많은 텐트가 밀집해 있다. 아, 바로 저기가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구나, 걸음이 빨라졌다. 1953년 5월 29일 오전11시 30분, 뉴질랜드의 양봉업자 에드먼드 힐러리와 현지인 텐징 세르파가 인류 최초로 에베레스트 정상(8848m)에 올랐다.
에베레스트의 원 이름은 ‘초모룽마’다. ‘세계의 여신’이란 뜻이다. 이름이 바뀐 것은 1865년 당시 영국정부의 측량관이던 조지에베레스트가 히말라야 지역을 측량하면서 그의 이름을 따서 에베레스트로 바뀐 것이다.
수십 개의 노오란 오렌지색 텐트들이 마치 전시장 같다. 각 나라에서 온 팀들, 그중엔 한국팀도 있다. 야크와 짐꾼들이 모든 물자를 에베레스트 캠프에 대준다. 감자, 쌀, 고기, 프로판가스, 석유, 과자 등등... 등반인 3명이 정상을 오르면 3명의 세르파가 따르는데 1인당 5천불씩 받는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4천불을 받고 나머지 천불은 에이전시가 소개비로 챙긴다.
이곳 세르파들은 누구나 영어를 잘한다. 세계각국서 온 등반객을 하도 많이 상대하다 보니 쓸줄 몰라도 영어회화는 그만이다. 또 라즈 꿀룽라이 짐꾼을 만났다. 쓰레기를 베이스캠프서 고락셉까지 운반한다. 100㎏의 짐을 지고 고락셉에서 베이스캠프까지 운반해 주는데 3만4천원을 받는다. 천길 낭떠러지를 만든 다양한 지층들, 마치 시루떡을 엎어놓은 것처럼 켜켜이 포개진 지층들, 물질적 풍요로움은 이곳 히말라야에선 거리가 멀다. 낡은 옷, 헝클어진 머리, 거친 손, 맨발이 이곳과 어울린다. 뽐냄도, 후회도, 성냄도, 현재도 생각하지 않으면 별로 걱정거리가 없다.
‘이르는 곳마다 내가 주인이고, 내가 선 자리가 모두 참이다...(중략)...모든 집착과 아집에서 벗어나 대 자유를 느껴라’ (중국 선불교 임제선사)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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