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덮인 북실마을은 전운이 감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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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덮인 북실마을은 전운이 감돌고
  • 보은신문
  • 승인 1999.03.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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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흘렀지만 역사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
북실로 진입한 북접농민군의 지도부에는 동학 교단의 고위 지도자들이 망라되었다. 교주 최시형과 함께 임국호, 정대춘, 이국빈, 송옹구(손병희), 배학수, 방장준, 이원팔, 김군오등이 북실까지 대부대를 인솔해 온 것이다. 이들은 지금의 누청리에 위치한 김소천가에서 저녁밥을 먹고 장차 군진을 옮길 계책을 강구했다고 한다. 그리고 북실로 들어오는 입구에는 뒤쫓아 오는 추격병을 탐지하기 위해 경계병을 배치해 두었다고 한다. 이때 일본군과 관군은 북실로 진입한 농민군을 소탕하기 위한 작전을 세우고 야간 공격을 결정한 일본군은 공격군을 3대로 나눠 북실의 농민군을 기습해 들어갔다.

이때의 상황을 일본군 보고문서에 따르면 『이날 밤은 눈이 많이 내리고 추위가 뼛골을 수셔 걷기에도 곤란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을 정도였다. 당시 북실로 들어가는 어귀에서 추격병을 경계하던 파수농민군 4명은 추위를 못 이겨 모닥불을 피워 놓고 몸을 녹이고 있었는데 기습에 나선 추격병은 이를 보고 습격해서 1명은 사로잡고 나머지는 살해했으며 붙잡힌 파수병을 문초해서 북실안의 상황과 농민군에 대한 더욱 상세한 정보를 얻게 되었다고 한다.

북실공격의 주역은 일본군이었다. 삼원 소위는 일본군 22명과 유격병대 50명을 지휘해서 오른쪽 산길을 택해서 눈속을 빠지며 행군에 들어갔고, 삼택대위가 인솔하는 일본군은 유격병대와 함께 왼쪽 큰 길을 통해 북실마을로 직행했다. 전투는 두군데에서 거의 동시에 시작되었다. 마을로 들어간 공격병은 먼저 최시형등 두령들이 묵는 집을 포위해 기습했으며, 일제히 총을 쏘아 대니 다섯명이 맞아 쓰러져 죽었다고 한다.

이들 중에 임국호, 정대춘이 있다고 했지만 확인되지 않은채 불더미 속으로 던져졌다고 알려지고 있다. 이 총소리에 놀란 마을안의 농민군이 반격을 가해기 시작했으며, 북실 전체가 총소리로 뒤덮혀 전쟁터가 되었다고 한다. 당시 상황을 집작할 수 있는데 고향이 성족리인 김홍만(부산 사하구)씨의 선대 집안에 구전으로 내려오던 이야기를 기록하고자 한다.


저희 조부님은 만자 주자며 아호는 문수, 1855년생이며 돌아가신 날이 1894년 음력 12월 18일 40세의 한창 젊음을 남기시고 고혼이 되신 분입니다. 사시던 곳은 성족리에서 종곡으로 가는 나즈막한 능선으로 되어 있던 오솔길을 넘어가면 바로 나타나는 10여호의 초가마을로 접어들면서 두세번째쯤에 위치한 초가에 세살 아래인 조모님과 다섯살 되는 외아들인 선친과 오손도손 살고 계였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니까 바로 음력 12월 18일날 온산은 눈으로 덮여 있고 길이며 산천까지 얼어붙어 있는 해거름쯤해서 장안에서 패한 공학군이 최후의 격전장인 성족리에서 마저 패하고 남은 패잔병이 안북실로 도망치는 뒤를 쫓는 왜군이 쳐들어 온다는 기별을 듣고 온 마을 사람들이 이불을 뒤집어 쓴 채 눈으로 덮인 뒷산으로 피신들을 하였답니다. 집안을 챙기고 마지막으로 막 나서려는 조부님 눈앞에 나타난 동학도 한분이 피를 흘리면서 들이닥치는 것을 본 인정 많고 의리가 있는 조부님은 얼른 그들을 방안으로 들어가서 아랫목에 술단지 모양으로 이불을 칭칭 감아 놓고 막문을 나서자 들이닥친 왜놈에게 발각되어 조총으로 온몸을 쑤셔 놓아 졌답니다.

마을 사람들은 어둑해서야 조용해진 마을로 같이 내려온 조모님은 마당에 들어서자 추녀밑에서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뒤범벅이 되어 꽁꽁 얼어 붙은 채 쓰러져 있는 조부님은 발견하고 기겁을 하였답니다. 물론 방안 술독 모양의 동학도 역시 이불에 쌓인 채 죽어 있는 것을 보고 위와 같은 추리가 되어 내려오고 있습니다.

37세의 젊은 과부가 된 조모님은 다섯살된 아들과 1934년 7월4일 그러니까 내가 다섯살되던 해까지 77세가 되시도록 고생을 하시며 살아온 인생살이야 우리네의 대다수가 겪는 일이라고는 하지만 나이 40세에 억울하게 돌아가신 우리 조부님의 넋을 위로할 길이 없어 늘 생각하고 있는 후손의 마음이라 이와 같은 사연이라도 하나 적어 비석을 세워 드렸으면하는 이 사람의 소망이며 동학의 최후가 조부님이 운명하신 동시가 된 운명이라는 것을 남기고 싶습니다.


이 글에서도 나타나듯이 당시 북실 전체의 상황은 농민군은 물론 전체의 상황은 농민군은 물론 지역 주민까지도 무참한 일본군의 학살에 피해를 본 지역임을 알 수 있다. 다음호에는 당시 전투상황을 기록한 문헌에 의해 좀더 자세히 소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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