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로운 사람 많았던 곳, 그곳이 장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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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로운 사람 많았던 곳, 그곳이 장안
  • 보은신문
  • 승인 1999.03.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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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은 장안마을 토착민들과의 자연적인 융화였다"
수만명의 동학교도들이 장안 지금의 외속리면 장내리일대로 모일 수 있었던 것은 경상도와 전라도, 충청도를 연결하고 있다는 지형적인 특징도 있겠지만 우선 당시 장안리일대에 살고 있던 정착민과 동학교도간의 생각이 같았다는데 있다. 19세기 후반 조선국가가 처한 어려운 상황속에서 동학은 새로운 민족종교로써 사회 내부의 모습을 극복하기 위한 시대이념이 담겨 있어 혁신 지식인을 중심으로 전국으로 확산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동학의 참뜻이 장안일대의 지역민들에게 아무런 거부감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배경에는 매관매수를 일삼는 부패정부에 대한 저항의식이 강했던 몰락양반과 벼슬을 뒤로 하고 성리학에만 몰두하던 향반들이 장안을 비롯한 보은지역에 많았다는데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수만명의 동학교도들이 장안으로 집결하고 장안일대에서 생활하면서 뜻을 같이해 동학에 직접 참여한 사실이 후손들의 증언에 의해 밝혀지고 있다. 다음의 글은 대전 신안동에 거주하는 배용환(61. 외속리면 황곡리)씨가 우편으로 보내주신 조부 배승기님에 대한 기록이다.


『우리 배씨 집안은 삼한갑기의 후예로 지금부터 약 300여년점 보은장안에 정착한 이래로 현재까지 생활해 오고 있습니다. 저의 8대조, 7대조인 선자 익자, 도자 삼자 할아버지께서는 정삼품 벼슬인 통정대부에까지 오르기도 하였습니다. 그후 후손들이 벼슬길이 막혀 향반으로 생활하는 처지의 몰락양반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1890년대 그 당시시대 상황은 일본으로 대표되는 외세의 침투와 지방관리와 토호들의 탐학과 가렴주구가 극에 달하여 민심은 흉흉하고 민초들의 삶은 하루 연명하기도 힘든 시절이었습니다. 이때 척왜양창의의 기치아래 반봉건, 반외세를 외치며 새로운 세게의 구현을 위하여 최재우가 창도하고 최시형이 지도하던 동학이 활발하게 활동하게 되었고 제2대 교주 최시형이 지도하던 동학교도들의 대규모집회가 보은 장안에서 1893년 3월 열리게 되어 전국 각지에서 동학교도 및 농민 등 서민층이 몰려들어 약 3만여명의 대규모 군중이 운집하게 되었습니다.

이즈음 보은 장안 황곡에서 몰락양반가로서 삶을 이어오시던 우리 증조부인 승자 기자 할아버지께서도 왜놈들의 경제적, 정치적 침투와 타락한 지방관리들의 착취, 가렴주고 및 지방부호인 토호들의 횡포가 극에 달하자 울분을 참지 못하며 의로운 일을 모색하던 차에 보국안민을 기치로 한 동학집회가 보은 장안에서 열린다는 것을 접하고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을 규합하여 동학의 보은집회가 성공적으로 끝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는 등 말단지 도부의 장으로 참여하였는바, 이때 대부분의 장안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동학에 뜻을 같이하여 집회가 열리는 한달여동안 주먹밥을 지어 나르고 각종 편의를 봐 주는 등 현실적인 지원을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1893년경부터 1895년경까지 동학집회가 열리거나 동학관계기관이 설치되어 있는 동안 장안마을 사람들의 참여와 지원은 눈물겨운 것이었고 그 일로 인하여 정부관군으로부터는 심한 탄압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렇게 동학의 보은(장안) 집회가 정부에 무시할 수 없는 큰 세력으로 인식된 데는 이러한 장안마을 사람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지원이 있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하며 그로 인한 정부의 탄압이 얼마나 극심했었을까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승자 기자 할아버지의 종제인 승자 현자 할아버지께서는 이러한 반외세의 동학정신을 이어받아 1905년 을사조약당시 을사의병 투쟁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당시 동학교도 또는 동학집회에 참여한 사름들은 소위난군 또는 난군의 가족으로 몰려 관과 지방토호들로부터 멸시와 학대 등 갖은 고초를 겪어야 했으며 재산도 강제로 빼앗기기도 하였습니다. 이렇듯 동학봉기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그 후손들은 도망다녀 숨어 살아야했고 말도 못하는 등 난군의 후예라는 멍에 아닌 멍에를 쓰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승자 기자 할아버지의 아들인 영자 선자 할아버지께서는 거의 평생을 벙어리로 살다시피하고 일자무식의 농부로 삶을 마감하셨습니다. 이러한 동학집회와 활동에 대하여 제대로 평가가 되지 못하고 『동학난』으로 몰리어 질때는 한스럽고 가슴이 아팠습니다. 왜? 우리 승자 기자 할아버지께서 35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셔야 했습니까? 왜? 장안마을 사람들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정부관군, 왜놈들로부터 3년여동안 분탕질을 당해야 했습니까?

다행히 얼마전부터 동학 및 동학정신 대하여 긍정적으로 재평가되어 동학혁명, 동학농민 전쟁, 동학농민운동 등으로 불리게 되어 조금은 위안이 되며 우리 승자 기자 할아버지를 비롯 장안마을 사람들의 의로운 삶과 죽음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게 된 것을 무척 다행스럽게 생각하며 그 의로운 분들의 한이 조금이라도 풀려서 늦게나마 편안히 쉬실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였습니다.

이번 보은신문의 동학현장에 대한 생생한 기획기사에 감사드리며, 당시 동학집회에 의롭게 참가한 사람들의 한이 조금이라도 풀리게 된 것을 참으로 기쁘게 생각하며 제 마음 또한 눈물이 글썽거려집니다. 이 마을 담아 삼가 의인들의 명복을 빕니다. 1999.3.9 배용환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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