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국안민을 위한 의인들이 모인 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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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국안민을 위한 의인들이 모인 성지
  • 보은신문
  • 승인 1999.03.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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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은 종교를 넘어선 구국을 위한 행동이었다"
보은에서 상주방면에서 자동차로 10여분 달리다 보면 외속리면 소재지인 장내리가 나온다. 보습산 골짜기의 줄기가 수푸림(林)자 모양새로 굽이쳐 흘러 마을을 끌어안고 있는 형세인 장내리는 19세기말 국운이 기울던 때 분연히 일어선 수만명 동학농민군이 반봉건, 반외세를 외치며 창의하여 보국안민의 깃발을 높이 들었던 곳이다. 동학의 2세 교주인 해월선사가 산간 벽지로 쫓겨 다니면서 포교 활동을 할 때부터 동학의 중심지였으며 1892년 대도소가 장내리에 설치되면서 동학의 중심지가 되었다. 원래 장안이라는 말의 지명은 조선조때 말을 놓아 기르던 마장이 있었는데 이 마장 안쪽에 마을이 있었으므로 『장안』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조선조말에 장안을 한자로 잘못 표기하여 장내라고 문서상 기록되었으나 실생활에는 조선조 이래 줄곧 장안으로 불렸다고 한다. 서기 1893년 동학교도 3만여명이 이 마을 앞 천 변에 모여 교조 신원과 척양왜를 내걸고 시위를 하여 이듬해 동학농민운동의 단초가 되었으며 2차 봉기 때는 북접 군이 이 마을에서 출전한 역사적 사실을 간직한 곳이다. 그해 3월 동학 장안집회 때에는 하도 많은 인파가 모여 「서울 장안이 장안인가, 보은 장안이 장안이지」 라는 동요가 생길 정도로 많은 동학교도가 모였다고 한다.

당시 보은 장안집회에 대해 관변측이 대처한 과정과 내용은 『취어』에 상세히 기록되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보은 장안집회는 지방관아에서 볼 때 전무후무할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즉각 보은군수는 왕조정부에 보고하여 그 실상을 알리고 향리의 우두머리를 시켜서 동학 지도자를 만나보게 하고 또 자신도 달려가 자세한 사정을 조사하였다고 한다. 장안마을에는 옥녀봉 기슭을 둘러싸듯이 집들이 들어차 있었는데 그중 대단히 큰 기와 집에 동학 도소가 설치되고 동학교도들은 각기 긴 장대에 깃발을 만들어 걸고 자갈돌을 모아서 성을 만들었으며 낮에는 천변에 모였다가 밤이 되면 부근 마을에 흩어져서 잤다고 한다.

당시 대도소가 있었던 자리에는 지금 터만 남아 마을 뒤쪽의 논으로 변해 있으며 "산아래 평지에 돌성을 쌓았는데 길이는 일백여 걸음이고 넓이도 일백여 걸음이며 높이는 반장정도로 사방에 출입문을 내었다"라는 기록은 돌성의 당시 규모를 말해주고 있다. 당시 쌓았던 돌성의 흔적이 논둑을 이루고 있어 형상이 분명함을 보여주고 있으며 돌성과 도소안에 모인 교도들은 노래를 부르고 주문을 외우며 교인으로서의 수행을 했했다고 한다.

관군이 와서 공격할 것에 대비하여 각 조직은 군사편제로 움직였으며 북쪽산과 남쪽산에 만든 초소에 깃발을 꽂았고 40~50명 정도 지키고 있었다고 하며 당시 초소가 있던 흔적이 지금도 산중턱에 남아있다. 이 때 장안에 모인 동학교도수는 기록마다 차이가 있었으나 적어도 2만5천여명 정도는 모였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장안마을 상류에 들어선 삼가저수지가 있기전에는 장안에는 온통 밭이었다고 한다. 당시 대추나무가 들어찬 밭이었는데 이 밭 사이에 돌성을 쌓고 집결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장안에 집결한 대규모의 교도를 관리하기 위해 포 단위의 조직을 제도화하여 정해진 포명과 대접주 50명에 이르러 다 알 수 있는 기록은 없다고 한다. 『취어』에는 각처에서 보은집회에 오는 사람을 날짜별로 지역을 밝힌 채 기록해 두었다고 한다. 엄청난 동학교도의 집결에 왕조정부는 해산명령을 내렸고 보국안민과 척양척왜의 주장을 군대로 막으러 한 것이다. 동학교도의 교단은 정면 충동하지 않으려면 해산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맨손으로 의지만 가지고 집결한 교도들이었기에 교주 최시형은 노약자를 먼저 물러가게 하고 젊은 교도는 남아서 정부에 본인의 뜻을 항변하고 있었다고 한다.

결국 4월 2일부터 20여일간 집결해 있던 동학교도들은 장안마을 떠나 고향으로 출발하였고 교주 최시형은 상주방면으로 떠나게 되었다고 한다. 장안마을의 집회가 해산되었고 교주 및 고위 간부들은 청산 갯밭과 보은 장안을 오가며 각지의 동학교도들과 연락하며 활동을 해 나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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