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과 개혁의 무대 보은
상태바
혁명과 개혁의 무대 보은
  • 보은신문
  • 승인 1999.02.27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동학은 전설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다"
조선 오백년 동안 영화를 누려온 양반계층은 갑오년을 전후하여 새로운 변혁을 맞게 된다. 1893년 봄 충청도 보은군의 장안마을과 전라도 금구현의 원평마을에서 정부의 부패척결과 외세의 침투를 배척하는 보국안민과 척외양창의를 기치로한 동학집회가 성행했다. 구조적인 사회모순에서 부패한 관리들의 탐용스런 수탈행위는 계속되었고 동학교세가 확대되면서 보은과 영동 등지를 비롯한 충청도 남부지역의 세력도 더욱 커지기 시작했다.

보은을 비롯한 충청도 남부지역은 동학조직이 더욱 방대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동학농민군은 농민들의 숙원인 부패한 관리들을 징치하고 오래 계속 되어온 잘못된 관행을 고쳐 나갔으며 더 나아가 일본군의 침략에 맞서 싸워 민심을 얻고 있었다. 전국 각지에 퍼진 동학교도들이 결집하기 시작했고 그 무대가 지금의 외속리면 장내리인 장안마을이었다. 보은 장안마을은 수만명에 달하는 대군을 수용할 여력이 없어 도소를 중심으로 4백개의 초막을 세워 몰려오는 동학농민군을 주둔시킬 준비를 하였다.

동학교단은 일본군과의 전쟁을 위해 출진할 준비를 갖추고 충분한 무기와 화약을 확보하고 군량을 마련하는 것은 어려움이 많았지만 전국에서 군수전과 군수미를 확보하기 시작했다. 수만명의 동학농민군이 장안 마을에 집결했다는 사실은 동학농민운동의 시작을 알림과 동시에 역사적 현장임을 보여주고 있다. 동학농민군은 북접과 남접으로 나누어 충청도와 전라도 일대를 오가며 활동하다가 보은읍 종곡리 일대 12개의 북실마을로 진입하게 되었고 북실에 있던 북접농민군의 지도부에는 동학교단의 고위지도자들이 합류하고 있었다. 자료에 의하면 교주 최시형과 함께 임국호, 정대춘, 이국빈, 송응구(손병희), 배학수, 박장준, 이원팔, 김군오등이 합류하고 있었다고 한다.

북실로 들어오는 입구에 뒤쫓아오는 추격병을 탐지하기 위해 경계병을 배치하고 마을안 지금의 누청리에 있는 김소천가에 지휘본부가 설치되었고 마을 전체가 동학군으로 가득차 있었다고 한다. 춥고 배고픈 동학군에게는 따뜻한 보금자리가 필요했으며 이런 처지에 찾아온 곳은 북실마을이었다. 북실마을에 몰렸던 북접농민군의 정확한 수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상당한 북접농민군이 북실에서 최후를 맞게 되었다.

북접농민군을 학살한 일본군과 상주소모영의 유격병대가 보은을 떠난뒤 북실마을 야산에 얼어붙은 수많은 시선은 관아에서 나와 수습하여 구덩이를 파고 묻어버렸다고 한다. 북실전투 이후 동학농민군의 활동은 최후를 맞게 되었고 동학혁명의 최후를 장식했다고 했고 과언이 아닐 것이다. 1894년 충청도와 전라도를 주요 활동무대로 거대한 변혁운동으로 기록되고 있는 동학농민운동은 역사의 커다란 전환기이다. 이러한 역사의 무대가 보은지역에서 처음과 끝을 장식하고 있다는 사실은 동학의 의미를 되찾고 근본적인 정신을 되찾는 일은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이 지역 사람들의 몫일 것이다.

지금 이러한 동학혁명의 시발점이 되었던 장안마을에는 최근 세워 놓았던 동학 취회지 역시 지난 98년 수해로 떠내려가 흔적조차 찾아보기 힘들정도이다. 동학의 흔적을 되찾고 동학의 근본 정신을 되찾을때 보은의 미래에 대한 지표가 설저오딜 것이라 믿고 있으며 다음호에서는 보다 구체적인 흔적과 현장을 살펴 보기로 하겠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