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암죽’ 몰라 격세지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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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암죽’ 몰라 격세지감
  • 구한회 재경보은군민
  • 승인 2010.06.17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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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지생활을 오래하면 고향은 꿈속에서도 그립다. 호호백발 노인이 되었어도 고향에 갈 때는 어린애처럼 가슴이 뛰고 설레는 것은 언제나 마찬가지다. 밤낮없이 시끄럽고 복잡한 서울의 도심을 벗어나 싱그럽게 우거진 신록의 생기가 넘치는 고향에 당도하면, 자동차의 경적 대신 숲속에서 들려오는 세월이 흘러도 소박한 시골의 정취는 잊히지 않는 정감으로 추억 속에 오래 커다란 가마솥 걸어놓고 쇠고기와 대파를 숭숭 썰어 넣어, 부글부글 끓여낸 얼큰한 국물에 밥 한술 떠 넣고 걸쭉하게 말은 장국밥 한 그릇이, 맨바닥의 멍석위에 앉아서 먹어도 출출한 시장기를 더는 데는 아주 그만이다.
이런저런 예전 생각을 하면서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일부러 장날 점심때를 맞춰 고향에 가서 시장 안을 이리저리 다 돌아다녀 보았지만 장국밥이 없다. 좀 서운했지만 그대신 모처럼 먹은 ‘올갱이해장국’도 맛이 괜찮았다. 그래서 남기지 않고 그릇을 깨끗이 다 비웠더니, 인심이 푸근한 식당 주인이 “부족하시면 더 드릴까요?”하고 물어, “아니요, 아까운 음식 안 남기려고 배부른데도 다 먹었어요”하고 사양하자, “옛날 보릿고개 겪으셨던 어르신이라 다르시네요.”한다.
그래서 “보릿고개 생각하면 끔직해요. 일제 강점기엔 ‘빨암죽’도 없어서 실컷 못 먹었는데, 음식 귀한 줄 알아야지요. 그때는 놋그릇까지도 다 빼앗기고 뚝배기에 ‘빨암죽’퍼 담아 먹었어요.”했다. 그랬더니 오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식당주인이 “빨암죽이 뭔데요?”라고 물어, “빨암죽 정말 몰라요?”하고 반문하자, “저희들은 보지도 못하고 안 먹어 봐서 그게 뭔지 몰라요”한다.
그들이 모른다하니 간략하게 설명해 주어야겠다 싶어서 “빨암죽은 겉보리를 노르스름하게 살짝 볶아 맷돌에 갈아서 채로 쳐낸 ‘빨암가루’에 맵쌀을 조금 섞어서 쑨 죽”인데, 살기 어려웠던 시절에 먹고 연명을 해온, 이 지방 고유의 아주 특별한 음식이라고 알려주었다.
지금은 모든 것이 풍요로운 데다가 날씬한 몸맵시 내려고 ‘다이어트’하느라 일부러 먹지 않아 쌀이 남아도는 세상이 되었으니, 우리말 큰사전에도 오르지 않은 ‘빨암죽’은 모를 만도 하거니와 교통사정이 청원·상주 간 고속도로의 개통으로 보은사람들이 피발령이나 새골재를 넘어 다니지 않고도 도시 접근이 수월한 광역생활권 시대로 변한만큼, 지난날의 궁핍했던 시절을 살아온 세대들은 달라진 세태를 반기면서도 만감이 교차하는 격세지감을 느낀다.

/구한회 재경보은군민(관기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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