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 오던 날의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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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 오던 날의 단상
  • 송원자 편집위원
  • 승인 2009.11.19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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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아침에 일어나니 하얗게 눈이 쌓여 있었고 눈발이 폴폴 날리고 있었다. 최근 바람이 불고 좀 추워진 날씨였지만, 아직도 가을이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겨울 속으로 풍덩 들어온 것 같았다. 밖에는 세찬 바람과 함께 흰 눈이 내리는데, 베란다에서 화려하고 예쁘게 피어있는 꽃들이 한층 더 사랑스러웠고, 첫 눈을 맞이한 마음은 설레고 들뜨면서도 평화로움을 느꼈다. 눈 오는 모습을 한참 바라보고 있으니 유년시절에 어머니가 하던 말이 생각났다.
“가을걷이 다 끝내고, 겨울동안 먹을 양식 쌓아놓고, 김장해 놓고, 땔감도 충분히 마련되어 따뜻한 방에서 일하지 않아도 되고 아무 걱정거리 없는 겨울날, 문을 열었을 때 하얀 눈이 내리면 너무 재미있다.”고 하셨는데 지금의 평온한 내 마음이 그 때 어머니의 느낌과 비슷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농촌에서는, 겨울을 맞이하기 위해 지금과 비슷하지만 많은 걸 준비해야 했다. 가을이면 마당은 타작을 해야 할 잡곡이 수시로 바뀌었고, 서리가 오기 전에 고구마를 캐야 하며 생업인 농업 일을 춥기 전에 서둘러 마쳐야 했다. 그리고 초가지붕의 이엉을 새로운 짚으로 얹어야 하고 보온을 위해 땔감을 준비해야했으며 문틈의 문풍지도 바르는 등 할 일이 많았다.
지붕을 바꾸는 날에는 일할 사람을 몇 명 얻어, 비바람에 일 년간 집을 온전히 지켜온 묵은 짚을 걷어내고 새로운 짚으로 갈아입히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벌레도 나오고, 묵은 짚과 새로운 짚이 섞여 주변이 산만하지만, 뛰어 놀다가 어머니께 꾸중을 들은 적도 있다. 저녁에는 꼭 팥죽을 끓여서, 부엌 벽과 무쇠솥뚜껑에 조금씩 뿌리고 부뚜막에도 떠서 놓은 뒤, 일하시는 분들의 저녁으로 내놓았다. 그리고 우리가족과 이웃집 아줌마들이 와서 함께 먹었는데, 난 팥죽 속에 들어있는 찹쌀 새알이 싫어서 골라서 먹곤 했다. 지붕이엉은 기술을 필요로 하는지 친구의 할아버지가 온 동네의 집을 다 다녀야 하므로 집집마다 순서를 정해야 했다. 지붕이엉을 마치면 어머니는 한시름 놓으시며 흐뭇해하셨던 만큼 큰 연중행사였던 것 같다.
가을걷이와 지붕개량, 김장이 끝나면 집집마다 붉은 팥 시루떡을 해서 이웃과 서로 나누어 먹었다. 그 떡을 우리는 갈떡이라 했는데 돌이켜 보면 추수감사에 따른 고사떡인 것 같다. 지금은 전문떡집이 있어서 떡을 하기도 편하고, 먹기도 쉽지만 그 때는 떡을 하기도 먹기도 쉬운 것이 아니었다. 거의 다 집에서 떡을 만들기 때문에 집집마다 크기가 다른 시루가 몇 개씩 있는데, 갈떡을 할 때는 우리 집에서 제일 큰 시루를 사용했다. 그 시루를 가장 큰 무쇠 솥 위에 얹고, 시루와 솥 사이에는 밀가루를 반죽하여 만든 시루뽕 이라고 했던 떡밥을 붙이고, 밑바닥에는 보자기를 깔고 시루 구멍에 둥근 무를 얇게 썰어 얹었다. 그 위에 방앗간에서 곱게 빻아온 쌀과 푹 삶아서 툭툭 적당히 빻은 붉은 팥을 켜켜 넣고 뚜껑을 닫은 뒤, 장작불을 집혔다. 김이 오르면 미처 시루에 넣지 못했던 쌀가루와 팥을 켜켜 더 넣고 꾹꾹 누르던 어머니의 손이 떠오른다. (잠시 옆길로 새어 갑자기 어머니의 늘 거칠었던 손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많은 자식들 챙기느라 그 얼마나 많은 손놀림이 필요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쌀과 팥이 어우러진 맛있는 냄새가, 부엌을 드나들며 언제쯤 떡을 먹을 수 있을까 고대하던 나의 코끝을 자극하게 된다. 떡을 만들 때도 적당한 양과 적당한 불의 정도가 중요했다. 혹 떡이 설익을 때도 있었는데 그럴 때면 정성이 부족하여 그런 것 같다며 어머니는 많이 속상해 하셨다.
그렇게 떡이 익었어도 바로 먹을 수 없어 많은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했다. 다 된 떡을 여러 개 접시에 담아, 장독대 옆에도 부뚜막 위에도 안방 등 여러 곳에 놓았던 것 같다. 아마 떡을 놓으며 어머니는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 했을 것 같다. 그런 과정을 거친 다음 올망졸망 어렸던 우리 형제들 앞에 떡 접시가 오고 우리는 기다린 만큼 허겁지겁 맛있게 먹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갈떡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상태에 이웃집에 돌려야 했다. 어느 해는 하얀 눈이 쌓인 눈길을 사각사각 걸으며 골목길을 걸었던 날들도 있었다. 그 갈떡은 집집마다 해서 서로 나눠 먹었기 때문에, 우리 집에서 떡이 떨어질 무렵에, 이웃집에서 가져온 따끈한 떡 맛을 볼 수 있어서, 한 동안 겨울밤을 더욱 포근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갈떡까지 해서 이웃과 나눠 먹고 난 뒤, 부모님은 큰댁이 있는 강원도 고향으로 시제를 지내러 가신다. 교통편이 좋지 않으니 한 번 다녀오실 때마다 오래도록 집을 비우셨고, 난 부모님의 부재에 슬퍼하며 혼자 울었던 기억이 있다. 부모님이 돌아오시면 너무도 기뻤고, 어머니는 다녀온 지역과 만났던 사람들과의 이야기보따리와 어느 땐가는 나를 위해 조개껍질을 가져다 주셨다. 그래서 난 지리시간에 강원도의 인재나 속초, 양구, 낙산사 그런 지명을 대할 때면 보은이라는 지명처럼 친숙함을 느꼈다. 지금도 강원도를 여행할 때면 주변을 세심하게 둘러보곤 한다. 혹 어디쯤엔가 어머니가 생활 하셨던 곳이 있지 않을까? 어머니의 추억이 살아 숨 쉬는 곳이며. 나의 뿌리이기도 한 지역이기 때문이다.
겨울에 접어들면, 반복적으로 유년시절의 겨울맞이가 떠오른다. 그 때에 어머니가 하셨던 말과 행동이 무한한 상상력을 가져다주었고, 자식을 위한 끊임없는 기도가 현재의 나를 지탱하게 하는 힘이 되는 것 같다. 그리고 난 내 자녀의 엄마로서 내 아이에게 어떤 힘을 줄 것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송원자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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