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에 왕건 다녀갔어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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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에 왕건 다녀갔어유∼(2)
  • 보은신문
  • 승인 2009.03.20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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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덕(보은남경카센터 대표)

보은 지역 지명중에 전쟁에 관련된 지명들을 찾아보자. 마로면(마차길), 기대리(깃대), 원정리(전쟁을 나온 원정군), 그 옆 산이 장군봉, 오천리(오천 명의 병사가 머물던 곳), 대왕산(대왕이 머물던 진지), 태자봉(태자가 머무른 진지), 북골(북을 쳐 신호를 하던 곳), 비지개(비지땀을 흘릴 만큼 급박히 넘나든 고개), 삼승산 정상의 지명(만수봉-왕의 만수무강을 기원), 이런 지명을 다 간직하고 있는 곳이 마로면 오천리인 것이다.

이곳의 지형을 살펴보자, 이곳 동네 초입은 좁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가면, 널따란 공간이 나오고 사방으로 산이 둘러싸여 천연적 요새이다. 그 위로 더 올라가면 좁은 골짜기가 나오는데 이곳은 오천리2구이다. 이곳 사람들은 우스갯소리로 비행기가 지나가면 앞이 보였다. 중간 보였다. 꼬리 보였다 하며 비행기 한 대를 통째로 보지 못했다 할 정도로 골짜기는 협소하고, 하늘만 빠끔히 보이는 그야말로 첩첩산중의 오지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곳에 대왕산, 태자봉, 북골, 만수봉, 비지개, 오천리 이런 왕이나 전쟁에 관련된 지명이 있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지 않은가. 물론 오천리에 한자표기를 보면, 梧川里(오동나무 오, 내 천)인데, 五千里(다섯 오, 일천 천)로는 쓰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삼국시대 말에 지도를 그려 넣고, 한자로 지명을 표기했을 리는 만무하다. 지도가 온전하게 등장한 것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가 완성본인 것이다.

지금 지도에 나와 있는 지명을 보면, 태자봉은 태재봉으로 북골은 붓골로 비지개는 비조재로 표기되어있다. 조선시대에는 왕자가 태어나면 태를 중요시 여겨 태실을 설치하고 보관하거나 기운이 왕성한 산봉우리에 돌로 태실과 태실도감을 만들어 보관할 정도로 엄하게 관리하였다. 이러한 조건으로 볼 때, 이곳이 태(胎)가 묻혀있는 태재는 아니고 현지에서 불리는 태자봉(太子峰)이 맞다.

하지만 실제로 그 동네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전자에 거론된 단어로 사용되고, 후자로 거론된 단어로 물어보면 잘 모른다. 이는 근세에 들어 지명을 표기하면서 더러는 오류가 많음을 알 수가 있고 한번 표기하기 시작한 지명은 틀렸다 하더라도 고치기가 쉽지 않다. 그냥 사용된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그렇다면 이곳이 태조 왕건이 삼년산성을 공격하러 와서 진지를 설치한 지역일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진다. 그러나 옛날에는 걸어서 전투를 하러 다녔으니까 이곳에서 관기리로 경유해서 보은까지 걸어서 오려면 하루는 족히 걸릴 것이다. 너무 먼 것에 대하여 의문을 가질 수 있지만 여기에도 해답은 있다. 오천리에서 탄부면 대양리와 성지레 사이의 비지개란 높지 않은 고개가 있다. 이곳을 곧바로 넘으면 덕동다리가 나오고 장바우, 석화리를 거쳐 평각을 경유 어암리로 걸어가면 약 2∼3시간이면 삼년산성에 도착할 수 있다.

또한 반대로 수비적인 측면에서는 야간에 단시간에 기습을 피할 수 있는 최적의 거리로 판단된다. 넘어 다니는 재의 이름도 비지재인데, 비지땀을 흘리며 재빠르게 넘나들었을 병사들의 모습을 떠오르게 만드는 대목이다.

또 산의 지명도 이상하다. 금적산을 마주보고 동쪽에 위치한 산이 삼승산이다. 이 산에서 출맥하여 오천리 절골 장님리라 지칭되는 바로 앞산이 대왕산이다. 즉, 청산면 만월리 뒷산이다.

그런데 대왕산의 높이가 삼승산의 높이보다 너무 많이 낮다. 그런데도 왜 지명이 대왕산일까. 크지도 않은 산인데 이상하지 않은가. 그 옆에 적당히 낮은 산이 태자봉이다. 어떻게 그곳에 대하여 그렇게 잘 아느냐 하면, 오천리 절골 장님리가 본인이 태어나 자란 고향이기 때문이다.

너무 황당하고 허무맹랑한 추리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실제로 그럴지도 모른다.
이왕 추리한 김에 태조 완건이 패하여 패주하게 되는 패주로를 추리하여 보겠다. 오천리 대왕산 너머에는 청산면 만월 리가 널따랗게 자리하고, 이곳에서 삼승면 원남리로 넘어가는 재가 있다.

이 재의 이름이 ‘혀재'혹은 '히어재'라고 부른다. 이 재 밑으로 다래시골이란 작은 골짜기가 있고, 말이 굴렀다는 말굴리 지명이 있다. 그 옆에 오천리 장님리와 경계를 이루는 곳에 '붙농골'이란 작은 골짜기가 있다. 우리가 지명을 지을 때, 상식적으로 부르기 거북한 이름과 천한 지명은 잘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곳의 지명을 보면 '분통'이란 단어와 '혀(혓바닥)'를 연상케 하는 지명을 붙여놓았다. 이는 싸움에서 패한 완건이 산을 넘으며 황급히 도주하였기 때문에 분통이 터져 울분을 토해 내었기 때문이 아닐까.

또한 뒤따라오는 적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서는 혓바닥을 내밀고 도망 가야할 만큼 급박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숨을 헐떡이며 혀를 내밀고 도망치는 패잔병들이 연상되지 않는가.

추리는 추리일 뿐 어차피 천년이 넘은 역사적 상황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고장의 삼년산성은 존재한다.

우리는 삼년산성을 보존하여 알리기에 노력하고 후손에게 잘 보존된 모습으로 물려줘야 할 책무가 있다. 여기에 흥미를 가질 수 있게 분칠을 하고 단장을 하여 보자.

우리는 최근에 전라도 어딘엔가 흥부이야기에 등장하는 흥부마을이 제작기 자신들의 마을이라고 주장하며, 법정다툼까지 불사하는 것을 보았다. 소설 속의 마을도 현실로 만드는 상황인데, 우리도 삼년산성의 역사성을 찾는데 노력을 기울여볼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관광자원은 노력여하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흥미진진한 테마로 만들 수 있다. 이렇게 역사성 있는 관광지는 많다. 진주 촉성루, 부여 낙화암, 충주 탄금대, 한산섬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얼마든지 관광차원에서 보면 발굴·홍보하여 흥미를 끌 수 있도록 상상을 자극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태조 왕건이 삼년산성을 공격하는 당시의 전지구축도와 전투예측상황도를 그려보면 어떻겠는가. 우리도 역사 속에 살아있는 마을을 만들어 보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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