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에 왕건 다녀갔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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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에 왕건 다녀갔어유∼
  • 보은신문
  • 승인 2009.03.13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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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덕 (보은남경카센터 대표)

존재하는 모든 사물이나 생명체, 무생물도 그 이름을 부여하고 부른다, 즉, 명칭, 이름, 지명, 표기명, 성명, 학명이라 지칭하는 것들이다.

이러한 것 중에 오늘은 우리고장의 동네이름과 지명에 대하여 내 생각과 추측을 역사적 사실과 결부시켜 추론해보고자 한다.

이글에 거론되고 생각과 주장은 오로지 저의 사견이며, 학술적 고증 및 검증은 고려치 않았음을 미리 밝혀둔다. 무게감을 두지 말고 봐주면 좋겠다.

예부터 내려오는 지명을 자세히 살펴보면 아무런 생각 없이 지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상판리, 중판리, 하판리와 같은 동네이름을 생각해보면 적당한 공간이 상·중·하를 이루며 종(縱)으로 적당한 위치에 있음을 알 수가 있다. 달산, 달미를 생각해보면 이 동네 근처에 눈썹모양의 아주 야트막한 산들로 이루어져 있고, 봉비리 동네도 보면 뒤쪽에 자리한 구병산이 마치 날아오르는 형국을 하고 있다. 또한 보은 들녘에 위치한 풍취리는 그야말로 사시사철 바람이 부는 길목에 위치해 있다.

이렇듯 지명과 지형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 외에도 땅이 질척질척한 질신리(질구지), 동네에 흰 바위가 있는 백석리, 공간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망월리, 마을과 마을 사이에 위치해 있어 지명이 붙여진 샛말과 중뜸이 있다.

이러한 지명들은 대부분 자연적 위치에 의해 지어진 지명이다.
풍수적 해석에 의해서 지어진 곳도 많다. 용촌리, 용곡리, 회룡리, 용호리(이때의 용은 산을 가리키)란 지형은 들판이 협소한 산중마을이 대부분이다.

또한 수문리, 만수리란 마을을 가보면 만산계곡수가 모여드는 지역이다.
또한 역사적 사연에 의한 지명도 많다. 절이 있던 곳이라 하여 절골이라 하고, 서당이 있던 곳은 서당골, 관기(관터가 있었음), 삼년산성(성의 존재)등이 있지만, 예외적으로 장내리나 성족마을은 동학 혁명의 성지였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근세사건이라 지명을 얻기에는 거리가 멀었던 것 같다.

상판리에 있는 정이품송도 역사적인 장소이지만, 지명을 얻지는 못했다.
따라서 현재 불리는 지명은 대략적으로 삼국시대부터 시작하여 고려시대, 조선초에 지명이 붙게 된 것이 대부분일 것이라 생각이 든다.

마로면 원정리와 오천리 사이에는 사모바위가 있고(현재는 삼바우라 불림), 오천리와 기대리 사이에는 가마소란 지명이 있다.

이곳은 보청천이 흐르는 곳으로 절벽을 이루고, 그 아래는 물이 휘돌아 치는 깊은 소가 있다.(소는 물이 도는 곳을 가리킴)

전설에 의하면 이곳에 붙여진 이름처럼 소에다가 가마를 싣고 가다가 소가 물에 빠져 가마에 타고 있던 신부가 빠져죽었다는 전설이 있다.

그런데 이는 와전된 이야기로 소는 물이 도는 곳이고, 그곳에 가마가 빠져서 신부가 죽었다는 것은 몰라도 구전에 의해 잘못 전해진 것이다.

이렇듯 음이 같다보니 소(沼)자가 소(牛)로 변하여 쓰여지는 전혀 다른 상황을 만들었다고 본다. 이러한 상황을 볼 때, 문자사용이 보편화되지 않은 시절에는 구전으로 지명이 불리어져 내려오다 보니, 오류가 많음을 알 수 있다. 옛말에 '아'다르고 '어'다르다는 얘기가 있다. 하물며 같은 음의 '소'자도 다른데, '어'자와 '아'자는 얼마나 다를지는 생각해 볼 여지가 없다.

각설하고, 사극 드라마 ‘태조 왕건'이 방영될 때, 우리 고장인 보은 삼년산성에 관한 전투장면이 나오는데 삼년산성을 공격하러 온 태조 왕건이 오천 명의 병사와 태자를 대동하고 출정하여 싸우다 팔에 화살을 맞고 대패하여 사경을 헤맬 때, 유금필 장군이 구출하여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져 패주하는 장면이 나온다.

삼년산성을 공격하러 왔었다면, 어딘가에는 전지구축을 한 곳이 있었을 텐데…. 과연 어디였는가 궁금해지지 않을 수가 없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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