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곡리 출신 명 판관 김 옥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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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곡리 출신 명 판관 김 옥 선생
  • 보은신문
  • 승인 2008.03.28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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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속하고 명확하게 판결

선생은 경주김씨로 자를 상지라 부르니 1603년에 증호조참판 첨지 중추부사 김덕민의 큰 아들로 보은읍 종곡리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일을 처리함에 있어 조용하게 처리하였고, 알맞게 하였으므로 요란하지 않았다.
1627년 인조 5년에 진사에 합격한 후 경상도 현풍 현감 겸 지주 진관 병마절제도위가 됐다.
선생은 벼슬길에 나아가서도 모든일을 진실하고 정성스럽게 처리하였고, 인기나 명성에는 관심도 없었다.
그러나 일단 일에 부딪쳐 결정을 내릴 때는 마치 대나무를 쪼개듯이 신속하고 명확하게 결정하였다.

현풍현지의 기록에 나온 선생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현풍고을 발암리에 시집을 온지 얼마 안되어 남편이 죽인 이씨가 있었다. 그 여인은 남편이 죽었지만 정성을 다하여 늙은 시어머니를 모셨으므로 마을사람들이 모두 다 효부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해 그의 시어머니가 어떤 사람에 의하여 목매인 채로 살해되는 참변이 있었다. 그때 그의 시집간 시누이가 현감에게 울면서 우리 어머니를 살해한 사람은 올케 되는 이 씨밖에 없다고 고발했다.
현감은 즉시 이 씨를 옥에 가두고 이 씨를 고문하여 자백을 받으려 했지만 이 씨는 변명을 계속해 며칠 동안 해결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선생이 신임 사또가 되어 이 고을에 부임하였다. 선생은 즉시 고을 사람을 크게 모아놓고 사건을 수사하기 시작했다. 먼저, 선생은 검시부터 했다.

그 결과 시어머니의 목을 조른 끈을 조사해 보니 그 끈은 다름 아닌 시누이가 항상 매고 다니던 허리끈이었다. 선생은 즉시 이 씨를 석방시켰다. 그리고 불과 이틀 만에 이 씨의 살해사건의 진상을 발표했다. 사건의 내용은 그 시누이가 어머니를 죽이고 그 누명을 이 씨에게 뒤집어씌우면 이 씨가 사형을 받게 돼 그 집 재산은 자연히 자기에게 상속이 될 것으로 생각, 재산에 탐을 내 어머니를 살해한 것이다. 선생은 즉시 그 시누이를 잡아 들여 시누이를 심문해 자백을 받아내 처형했다. 그리고 효부 이씨에게는 가까운 일가 중에 양자를 삼도록 주선하여 행복학 살아가도록 했다.】

선생은 1646년 인조 24년에 44세의 일기로 고향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흥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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