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가 곧 시작되는 1일 회인면 쌍암3리를 찾았다. 자연마을 명으로는 초개골, 옛날에 풀이 무성했다하여 붙여졌다고 한다. 도대체 어디에 그렇게 풀이 많아 마을이름까지 풀이 많은 동네라고 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마을을 찾았을 때는 마침 설 대목장이 섰던 보은장을 찾은 탓이었는지 겨울철 주민들의 집합소인 경로당은 한산했다. 할머니 두 분이 넓은 경로당을 차지하고 있었다.
설에는 이 경로당이 주민들로, 또 모처럼 고향을 찾은 자식들로 들썩거릴 것이란 생각을 하면서 할머니와 이런저런 마을에 대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때마침 설 대목을 보겠다며 회인 곶감을 사기 위해 청주에서 중간 상인들이 마을을 찾았다. 회인곶감이 워낙 유명해서 설이 되기 전에 이미 다 팔았는데, 조금이라도 남은 게 있으면 사가겠다면서 마을을 찾은 것이다. 할머니들은 이들에게 남아있는 곶감을 팔기 위해 부산히 움직였다.
이들은 마을에 남아있는 곶감을 긁어갔다. 이날 회인곶감의 진가를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대부분 곶감으로 가계소득을 얻고 있는 초개골은 박건태(57)이장과 노병열(75) 노인회장, 김정희(60) 부녀회장, 노명주(49) 지도자를 비롯해 전체 21가구 52명이 거주하고 있다.
# 집집이 돌아가며 저녁식사 당번
어느 마을이든 경로당이 가장 번듯한 집이듯 초개골도 경로당 하나는 잘 지어놓았다.
주로 겨울철에 사용하는 경로당은 그야말로 특별히 할 일도 없고 연세가 높으신 어르신들에게는 아주 좋은 놀이터다.
거동이 불편해 이웃집에 놀러다니기도 힘들어 차가운 냉방에서 혼자 지내기 일쑤인데, 경로당이 있으니 집안에 특별한 일이 없는 어르신들은 대부분 경로당에 나와 위풍도 없고 방바닥 따뜻한 곳에서 하루일과를 보낸다.
아침 밥을 대충 해먹고 9시, 10시만 되면 마을 주민 대부분이 경로당에 모인다. 윷놀이도 하고 곶감 시세도 얘기하고 각 집안의 사정도 얘기하고 회인시장 얘기도 하는 등 시시콜콜한 얘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르며 지낸다.
그러다가도 저녁때만 되면 일을 한다. 무슨 일인가 하면 바로 동네 주민들이 함께 먹을 밥을 하는 것.
집집이 돌아가면서 동네 주민이 모두 먹을 저녁을 하는데 취재를 나간 이 날은 최남현(77) 할머니가 당번이었다. 최 할머니는 회인 장에서 푸짐하게 장을 봐온 것들을 경로당에 풀어놓았다.
할머니 연세가 있으시니까 할머니보다 젊은 박순남(69)·박순년(64)·김효순(63) 새댁(?)이 저녁밥 짓기에 나섰다.
쌀을 씻어 밥을 하고, 동태를 씻은 후 무를 숭숭 썰어 넣은 동태국을 끓이고 간장으로 양념을 해서 참깨를 솔솔 뿌려 무쳐낸 청태 등 한 상 거∼ 하게 차린다.
이렇게 저녁 준비를 다하면 방송을 한다. “주민 여러분 오늘 누구 누구씨가 저녁을 준비했으니 모두 나와서 드시기 바랍니다.” 방송을 하자마자 주민들은 모두 경로당에 모여 맛있는 저녁 만찬을 즐긴다.
취재를 하는 기자에게도 저녁 먹고 가라는 할머니들의 권유가 있었으나 반 입맛만 다시고 돌아왔다. 할머니들이 차려낸 저녁을 함께 하고 싶었는데 정말 아쉬웠다.
# 곶감 집산지로 보통 200접 생산
회인곶감이 브랜드화하면서 다시 각광을 받은 것은 불과 몇 년 전이다. 원래 회인현이었던 회인은 회남면과 함께 감고을이었다. 하지만 대청댐 조성으로 안개발생일수가 많아 이미 회남은 감고을로서의 명성은 사라진지 오래됐다.
그렇다면 회인의 사정은 어떠해졌는가. 경쟁지역이었던 영동과 상주가 지역 특산물로 감을 특성화시킬 때 보은은 포기해 회인의 감을 영동과 상주 상인들이 거의 전량을 헐값에 사갔다.
대신 영동과 상주상인들은 회인 감을 잘 가공해 고가의 상주곶감, 영동곶감으로 팔아 영동곶감, 상주곶감의 명성과 지위를 누리게 됐다.
일부 주민들이 곶감을 만들어 청주시장 등에 내다 팔았는데 영동과 상주곶감에 비하면 큰 가격 차를 보이며 거래됐다.
그러다 민선시대가 되면서 2000년경부터 회인곶감을 브랜드화 하고 포장재를 제작해 농가에 보급, 회인곶감의 명성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그 선두에 초개골이 자리잡고 있다.
현재 초개골에는 7농가가 작목반에 가입하고 있으며 보통 200접의 곶감을 생산하고 있다.
이중 곶감을 많이 생산하는 박건태 이장을 비롯해 노병영(61)씨, 허금성(60)씨는 농가당 10동(1천 접)이상 즉 10만개 이상의 곶감을 생산하고 있다.
가격은 1.5㎏이 3만원, 3㎏을 6만원씩에 판매했으니 적게 하는 집은 2, 300만원, 많이 하는 집은 3, 4천만원의 소득을 올리고 있다. 마을 전체적으로 보면 곶감 판매액이 상당하다.
더욱이 1년 내내 손이 가는 것도 아니고 늦가을 감을 수확해 감을 깎아 널어 겨울철 부업으로 집집이 적게는 300만에서 많게는 4천만원의 소득이 생기니 농촌에서 정말 괜찮은 소득작목이라 꼽을 수 있다.
# 감과수원 대대적 조성
작목반을 구성하고 브랜드화 한 후 회인곶감의 가격이 곱절되고 수입도 좋아지자 많은 주민들이 논과 밭에 감나무를 심어 과수원으로 조성했다. 옛날부터 있었던 감나무에서 큰 돈이 생기자 사과나 배처럼 계획적인 과원을 조성한 것이다.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군에서 배나무를 권장해 배나무 과수원이 많았다. 또한 유실수를 비롯해 과수 등 품종을 개발하는 임흥원농원이 있었고 여기서 처음으로 배나무를 Y자로 유인해 터널 식으로 키워 주민들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감나무에 비해 손이 많이 가기 때문에 몇 년 농사를 짓다가 타산이 맞지 않자 모두 베어버리고 감 농사를 짓는 것이다.
이렇게 감 농사에 주력하면서 그 전에는 없었던 상황이 생겼다. 전에는 특별한 관리없이 감이 달리면 가을에 수확해 곶감을 깎았기 때문에 감이 유기농 농산물의 대표였으나, 이제는 여름내 거름을 주고 약을 하지 않으면 장맛비에 감이 모두 빠지고 또 감나무에 벌레가 생겨 가을에 수확할 감이 없다.
그 어떤 농산물도 농약을 하지 않으면 농사를 짓지 못하게 된 것이다. 한 해는 감이 많이 달리고 그 다음해에는 조금 적게 달리는 해갈이는 해도 농약은 하지는 않았었는데 참 안타깝다.
초개골 주민들도 설을 쇠고 나면 주변 지역을 다니며 올해 생산되는 감을 사러 다닌다. 무슨 말이냐 하면 나이가 많아 직접 감을 따지 못해 곶감을 만들지 못하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감나무 한 그루 당 얼마씩 돈을 주고 계약을 하는 것이다. 거상들이 된 것이다.
어쨌든 이렇게 라도 주변 감나무를 관리하니까 곶감 생산량이 점차 늘고 관리도 잘되고 곶감을 생산하는 수준도 향상돼 회인 감의 명성을 점차 회복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판매 또한 시장에 나가 흥정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을 통하거나 주문전화로 판매하는데 중간 상인 없이 대부분 직거래여서 농가의 수입이 높은 것이다.
# 녹색농촌 체험마을
곶감 생산으로 유명해지면서 초개골은 2001년 녹색농촌 체험마을로 선정됐다.
주변에 돌탑도 있고 또 군에서 구룡산 삼림욕장도 조성해놓고 또 마을 앞산에는 장수굴도 있는 등 관광자원과 함께 도시민들의 영농체험거리인 곶감도 생산하고 있으니 조건이 딱 맞았던 것이다.
여기에 경지정리가 되지 않아 생긴 대로 수 십 년 동안 벼농사를 지어와 논이 모두 경남 남해에서 봤던 다랑이 논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고 있어 개발되지 않은 농촌다운 정취를 느끼기에 더없이 좋았다.
마을에서는 그래도 마을환경을 정비한다고 담도 쌓고 물레방아도 만들고 시골 전형적인 농가형태의 숙소도 만들어 도시민들을 맞을 준비를 마쳤다.
선정 초기에는 군에서도 도시 소비자들을 유치하는데 신경을 써 마을에서 숙박을 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마을을 찾는 도시민들이 있었다.
이들은 마을 주변을 구경하고 감 따기도 해보고 또 감을 깎아보기도 하는 등의 체험을 하고 집으로 돌아갈 때는 동네에서 생산되는 각종 농산물도 구입하고 또 감 가지도 꺾어 가는 등 초개골에서 많은 추억 쌓기를 했다.
그러나 현재 이것도 흐지부지해져 지금은 녹색농촌체험마을 타이틀만 남았다.
체험자용 집은 허술하기 짝이 없이 빈집으로 남아있고 돌아가지 않는 물레방아가 점점 어려워져 가는 농촌실정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농촌 체험 농사체험을 위해 마을을 찾는 도시민들로 마을이 북적대길 기대하는 마음으로 발길을 돌렸다.